『리상의 꿈과 희망』이 이루어 지는 세계로! 안녕하세요! 대림대학 경영정보계열 겸임교수 정상덕입니다. 제 블로그를 찾아주신 여러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저는 지금 기업체강의(산업체강의)를 주로 하고 있고요, 대림대학 경영정보계열에서『회계학』강의를 하고 있습니다. 저는 『현대인재개발원』교수실에서 "수석교수"로 약 4년간(1995.3.25 ~ 1998.12.31) 근무한바 있으며, 대림대학에서 약 17년째(1993.8.23
2013년 8월 7일 수요일
일본을 바로 알자! 일본의 재무장과 한반도 침공계획
일본을 바로 알자! 일본의 재무장과 한반도 침공계획
일본은 1954 년 3 월 8 일 미일상호방위원조협정이 체결되면서 일본 재군비의 본격적 단계를 열었고 방위청이 설치됨과 동시에 자위대가 발족되었다. 이어서 1960 년 1 월 워싱턴에서 신 미일안보조약이 조인되었다. 신 안보조약은 구 안보조약이 가진 기지대여협정의 성격에서 일본 경제의 부흥을 배경으로 하여 보다 밀접한 미일군사동맹의 형성을 목표로 한 것이다. 이는 미국의 아시아 전략, 즉 반제국주의 세력의 진압을 위해 일본의 군사력이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을 공식화하고 명문화한 것이다.
한일 양국간의 국교정상화가 한창 추진되고 있던 1965 년 2 월, 일본의 국회에서 한 사회당 의원에 의해 폭로된 이른바 '삼시三矢작전'을 통해 일본의 재무장이 목적하는 바를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미 국방차관 질 패트릭이 삼시작전의 입안을 지휘 감독하였고, 고이즈미 준야고(전 수상고이즈미 준이치로의 父) 방위청 장관의 지휘하에 육군 중장 요시오 다나카에 의해 입안 계획된 이 작전은 삼시(미쓰야, 세 개의 화살)라는 이름이 말하듯 일본이라는 활에 한국이라는 화살을 재어 대륙(중.소)으로 향한다는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삼시작전계획은 계획 입안자인 요시오 다나카의 국회 증언에서 밝힌바와 같이 단순한 훈련계획이 아닌 실전을 위한 계획이었던 이 작전 계획안에는 196X 년 7 월 19 일에 제 2의 한국전쟁 발발을 상정하고 있었다. 비어 있는 끝자리는 아마 베트남 전쟁의 종전에 의해 결정될 것이었다.
1,419 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의 이 삼시계획은 제 2 의 한국전쟁에 대한 대비책을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있었다. 즉 이 계획안에는 신속한 '징병 및 징용'과 '전국적 전시체제화' 등과 같은 여러가지 법이 입안되어 있었으며 이 법안들은 하루밤 사이에 즉각 공표되어 일본 전역을 완전한 전시동원체제로 바꾸어 내도록 계획하고 있었다. 특히 징병법은 일본 육 . 해. 공군의 60 %를 남 . 서 지방에 배치시키는 내용을 담고 있었는데 이 지방은 한반도와 연결되는 관문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이와 함께 몇몇 수정안에는 한일 지상군과 대만의 국민당 군대의 군사작전에 대한 작전기지 및 병참기지의 제공문제를 다루고 있었다. 동시에 한국군은 일본의 지휘하에 놓이게 되지만 한국의 특수한 상황때문에 유엔기 아래 작전을 수행할 것이며 국민당 군대는 미 제 5 공군의 본부가 주둔해 있는 오키나와의 작전 . 병참기지로부터 미국의 지휘를 받도록 되어 있었다.
또한 이 계획안은 북한과 중국에 대한 상륙작전과 함께 핵무기 사용을 규정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마도 계획 전체에 대한 일본 국민의 적극적인 동의를 이끌어내기 위한 방편으로 여겨지지만, 일본이 1905 년 러시아로부터 탈취해서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차지하고 있었던 석유자원이 풍부한 소련의 사할린에 미 . 일 합동상륙작전을 전개한다는 상황을 설명하고 있었다.
삼시작전계획에 뒤이어 1965 년 10 월 29 일 일본 의회에서 폭로된 '비룡'계획 역시 모종의 군사적 계획에 관한 것이었다. 비룡계획은 표면상 방어계획이라는 묘한 조건을 달고 있었지만 실제적인 내용은 선제공격을 위한 것임에 틀림없었다. 즉 이 계획은 전쟁이 실제로 일어나기 30 일전의 세부적 군사조치를 규정하고 있다. 이 기간 동안에 일본 '공군자위대'와 일본에 있는 미군 기지는 24 시간 연속 경계 태세로 바뀐다. 처음 열흘 이내에 군 통신소는 새로운 암호로 바뀐다. 두번째 단계는 북한과 중국에 대한 선제공격을 위한 작전의 토대를 마련하고 있는데 이 단계에서 미 제 5 공군과 일본 공군은 합동작전을 원활히 하기 위해 전 태평양 지역 관할 미 공군의 지휘 하에 놓인다. 베트남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펜타곤 컴퓨터가 책정한 처음 한 달 동안의 18 % ~ 30 % 의 항공기 손실은 일본 공군측이 보충할 것이다. 이 비룡계획은 삼시계획과는 달리 작전목표에서 소련은 제외되어 있었다.
이상의 두 가지 계획이 단순한 연구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실제적 군사 작전계획에 해당하는 것이었다는 사실은 실질적인 준비에 의해 그 계획이 뒷받침 되고 있었다는 점에 의해 명확해 진다. 이 실질적 준비는 두 가지 계획이 폭로되어 세상을 놀라게 한 뒤에도 중단되거나 취소되지 않고 계속되었다.
실질적 준비의 일환으로서 1961 년 11 월 일본 암수현에서 한반도의 38 선 돌파를 상정한 산악전 군사훈련이 1 만 2,000 명의 병력과 2,000 대의 차량이 참가한 일본 자위대의 군사훈련이 있었으며, 1962 년 10 월에는 일본 해상자위대의 대한해협 봉쇄작전 훈련을 실시하였다. 이에 호응하여 한미공동의 해협봉쇄훈련도 실시하였다. 이는 일본으로부터 한반도로 병력과 군장비를 수송하는 주요 수송로를 안전하게 확보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1967 년 5 월 북한 해역 앞바다에서 실시된 미 해군기동훈련과 존슨 대통령의 방한 이후 더욱 빈번하게 실시된 한미 합동 상륙훈련 및 산악전투훈련은 196X 년 7 월 19 일을 위한 예행연습으로 간주될 수 있었다. 한미 해군훈련의 일부는 북한 해안지방의 봉쇄훈련이었는데, 소련 구축함과의 충돌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이러한 군사적 예행연습과 함께 한국과 일본의 군대를 하나의 작전체계로 통합해 내기 위한 일환으로 1960 년에는 이제까지 30분의 시차가 있던 한국과 일본의 표준시차를 일본과 동일하게 조종하였다. 또한 1962 년 10 월 1 일자 <동경신문> 보도에 의하면 일본 방위청은 한일국교정상화에 수반되는 군사적 과제로 다음의 다섯 가지를 검토하였다 한다.
1. 비상시에 있어서 대한해협의 공동봉쇄,
2. 군사계급제도를 한국 . 대만과 일치시킬 것,
3. 한국군 병사의 훈련 . 양성,
4. 한국군 병기의 수리 및 보급,
5. 방위주재관의 서울 파견 및 한일 양국 군인의 상호교류.
한국군과 일본군을 통합시키기 위한 노력은 1960 년대 후반까지도 계속되었다. 1967 년 9 월부터는 애초의 계획대로 일본인 방위주재관이 서울에 상주하기 시작하였고, 또한 1968 년 10 월부터 일본 자위대 막료장의 방한을 정기화했고 1971 년부터는 한국 국방대학원 연수단과 일본 방위연수소의 현지 연수를 정기화 했으며 1975 년부터는 퇴역고급장교 그룹의 상호교류를 개시했다.
이와 함께 한일 양국간의 군사통신체제의 확립을 목표로 다음과 같은 조치들이 취해졌다.
*1967 년 한국과 대마도 사이에 수중 청음기 설치.
*1968 년 3 월 한국의 레이다와 일본 본토, 오끼나와, 대만의 레이다를 일체화한 한 . 일 . 대만의 극초단파 통신망 센터를 일본 천엽현 영강산에 설치.
*같은 해 6 월 한국 울산의 무룡산과 일본 도근현 사이에 마이크로 통신망 설치.
*1969 년 한일간에 20 회선의 텔렉스 교환을 신설.
*1970 년 6 월 충남 금산에 한일 위성중계국 설치, 서울 동경 간의 직통 전화선 개설.
*1972 년 2 월 일본 항공자위대의 뱃지시스템(badge system)을 한미 항공 시스템에 연결.
이어 한일간 긴급수송체계의 확립을 위해,
*1970 년 6 월 부산-하관 사이의 페리호 선박을 개항.
*같은 해 서울 . 부산간의 고속도로 완성 : 도중 비상시에 활주로로서 사용기능한 지점 확보.
물론 위에서 열거한 사항들이 반드시 군사적 목적에 국한된 것은 아닐 것이지만 그러한 군사적 필요가 반영되어 있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상한 나라 대한민국 19 에서 계속 ...
피드 구독하기:
댓글 (Atom)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