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lo CEO] 인도네시아서 전기밥솥 1위 성공신화를 쓰다 | |||
마용도 용마전기 회장 "인도네시아에서 전기밥솥을 파는 건 알래스카에서 냉장고 파는 격" 소리 들었지만 시장이 없다고?…그럼 만들면 되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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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가 보장된 한국 시장을 버리고 해외로 나간 사람이 있다. 그가 가지고 간 제품은 그곳에 없는 제품이었다. 그가 가지고 간 제품명은 해당 국가의 말이 돼 버렸다. 그는 그곳에서 시장을 만들었고 프리미엄 브랜드를 만들었다. 나이키나 월마트처럼 자사 소유의 공장도 없다. 한국 본사에서 연구ㆍ개발(R&D)하고 중국 공장에서 제품을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한 뒤 인도네시아에 수출하는 글로벌 시스템을 구축했다. 그가 바로 용마의 창업자 마용도 회장이다. 그가 생면부지의 땅에서 어떻게 시장점유율 1위의 성공신화를 만들었을까? 마 회장의 `인도네시아 시장개척기`를 들어봤다. 한국에서 7시간가량 비행기를 타고 서남쪽으로 가면 5300여 ㎞ 떨어진 곳에 인도네시아 자카르타가 나온다. 이곳에서 마용도 용마 회장은 전기밥솥 하나로 `밥솥 왕국`을 만들고 있다. "매직콤(Magic com) 주세요." 인도네시아의 카르푸 매장에서 밥솥을 사는 사람에게 흔히 들을 수 있는 말이다. 인도네시아에는 전기밥솥이라는 단어가 없다. 이 때문에 용마가 생산하는 전기밥솥의 브랜드인 매직콤이 자연스럽게 전기밥솥의 뜻을 갖게 됐다.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일본제 코끼리표 밥솥이나 샤프 밥솥을 사면서도 "매직콤 주세요"라고 말한다. 그도 그럴 것이 용마가 생산하는 매직콤이 인도네시아 시장에서 전기밥솥의 대명사가 됐기 때문이다. 그의 리더십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마 회장은 "생각을 바꾼 발상의 전환에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많은 사람은 우리나라 밖에 무한한 시장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생각으로 끝난다"며 "창조적 아이디어는 실행함으로써 성취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는 아무리 어렵고 힘든 일도 생각을 바꾸면 쉽게 해결된다고 믿는다. 이른바 생각을 바꾸는 `발상의 전환 리더십`에 대한 신봉자다. 마 회장은 또한 직원의 자율성을 중시한다. 그는 "사장은 일하는 사람이 아니라 방향을 정하는 사람"이라며 리더십이란 "직원이 사장 눈치보지 않고 맘껏 일하도록 배려한 데 있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사장이 사무실에 있는 것을 불편해하지 않도록 오전만 출근해 결제하고 그 이후는 집에서 일한다. ◆ 세상은 넓고 시장은 크다 = 외환위기 직전인 1995년 한국 전기밥솥 시장은 포화상태였다. 출혈경쟁으로 많은 기업이 도산 직전까지 내몰리고 있었다. "이대로 출혈경쟁을 하면 회사가 망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마 회장은 "당시 직원 300명을 먹여살릴 생각을 하니 앞이 깜깜했다"며 "위기의식에 몸서리가 쳐졌다"고 말했다. 1979년 10월 창업 이래 대우전자와 필립스에 전기밥솥과 주방용품을 만들어 납품하고 일부는 직판을 했기 때문에 헐값경쟁은 경영에 치명적이었다. 그는 머리를 식히기 위해 인도네시아로 친구들과 골프여행을 떠났다. 이틀 여행이었다. 여행을 하며 재래시장을 방문했다. 밥솥회사 사장인 그의 눈에 골동품 가게에 있는 전기밥솥이 한눈에 들어왔다. 사실 그것은 밥솥이 아니라 밥만 할 수 있는 `열판`이었다. 마 회장은 반사적으로 "인도네시아에도 전기밥솥이 있나요"라고 물어봤다. 그런데 가게 주인으로부터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전기밥솥이 무엇인가요." 인도네시아에는 그때까지 전기밥솥이 없었던 것이다. "정말 전기밥솥이 없단 말인가?" 호기심에 전자제품 판매점을 방문했다. 가게 주인의 말대로 전기밥솥이 무엇인지조차 몰랐다. 서울로 돌아온 마 회장은 시장조사를 해봤다. 조사 결과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됐다. 부산에서 유독 용마의 전기밥솥이 잘나가고 있었다. 탐문 결과 인도네시아에서 온 보따리장사들이 용마가 생산한 전자밥솥을 대량으로 구매해가고 있었던 것이다. 마 회장은 국내 시장을 접고 당시 인구 2억2000만명의 거대 시장에 도전장을 내기로 결심했다. ◆ 내 브랜드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다 = "결론은 해외시장이다." 마 회장은 인도네시아에 푹 빠지기 시작했다. 대우전자와 필립스의 OEM업체로는 미래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 내 브랜드를 갖자. 시장이 없는 곳에서 신세계를 창조해보자." 일부는 알래스카에서 냉장고를 파는 격이라며 반대했다. 하지만 마 회장의 결심은 단호했다. "인도네시아는 정말 매력적인 시장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때 기준으로 인구가 세계 4위 2억2000만명이었으니까요. 그 많은 사람이 일반 솥에 밥을 지어먹고 있었어요. 제가 전기밥솥을 소개하자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입을 쩍 벌릴 정도로 신기해했습니다." 마 회장은 "시장이 없기 때문에 무에서 유를 창조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됐다"고 강조했다. 전기로 밥을 하는 마술 같은 전기밥솥이라는 의미에서 `매직콤`이라고 이름을 정했다. 취사와 보온 두 가지 기능을 갖춘 전기밥솥에 `매직콤`이란 브랜드를 달아 제품을 출시했다. 마 회장은 "당시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전기밥솥이 무엇인지 몰랐기 때문에 밥하는 방법에 대한 교육을 매우 중시했다"고 말했다. 마 회장은 신문광고를 통해 `전기밥솥`의 효능을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선풍적인 인기몰이가 시작됐다. ◆ 인도네시아인의 마음을 울리다
하루 생산 능력 2000개에 불과했던 경기 군포의 공장에는 비상이 걸렸다. 밀려드는 주문을 맞추기 위해 24시간 공장을 가동해야 했다. 현지 유통업체들이 경쟁사보다 먼저 제품을 확보하기 위해 공장 앞에 진을 치는 일까지 생겼다. 인도네시아에서 비행기를 타고 와서 군포공장 앞에 투숙하며 완제품이 만들어지는 대로 실어갈 정도였다. 1997년부터 매월 공장을 증설해 하루 생산시설 1만5000개까지 규모를 7배나 키웠다. 마 회장은 다양한 사회공헌을 통해 현지인에게 다가섰다. 지난해 10월 인도네시아 파당지역에 지진이 발생하자 쌀 1만포대와 밥솥 1000개를 보냈다. 2003년과 2008년에는 인도네시아대학(UI)과 족자카르타에 있는 다자마자대학 등 현지 명문대학 두 곳에 도서관과 음악당, 카페테리아를 갖춘 현대식 건물 `한국관`도 세워줬다. 이곳에서 수많은 인도네시아 학생들이 한국어 공부를 하며 한국을 배우고 있다. ◆ 경쟁사들이 생겨나다 = 매직콤이 불티나게 팔리자 1998년쯤 복제품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프리미엄 브랜드`전략을 고수하던 용마에 최대 도전은 헐값 제품이었다. 특히 중국의 저가 OEM제품들이 쏟아졌다. 일본제 고가 제품도 시장을 교란시켰다. 매출이 순식간에 20%가량 급감했다. 문제는 현지 기업들이 매직콤이라는 브랜드를 달아 사용하면서 심각해졌다. `○○○매직콤`, `△△△매직콤`이란 브랜드로 고객들을 혼란스럽게 했다. 결국 현지 업체 4개사와 소송을 해서 이겼다. 용마가 승소함에 따라 현지 업체들은 `매직콤` 브랜드 대신 `밥솥(rice cooker)`이라는 명칭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이 결과 매출이 다시 늘기 시작했다. ◆ 오픈 소싱으로 경쟁력 발휘 = "2005년 들어 한국에서 공장하기가 정말 힘들어졌습니다. 무엇보다 인건비가 급등했습니다. 저는 고민에 빠졌습니다. 공장을 해외로 이전할 것이냐, 아니면 아웃소싱할 것이냐를 놓고 밤잠을 설쳤습니다." 마 회장은 "제품 경쟁력은 물론 가격 경쟁력을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며 "눈물을 머금고 중국 광저우로 생산기지를 옮겼다"고 말했다. 그는 직접 투자하는 방식 대신 OEM방식을 선택했다. 왜냐하면 그 자신이 수년 동안 대기업의 OEM으로 활동해왔기 때문에 OEM의 메커니즘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이키처럼 서울 본사를 연구개발(R&D)센터로 전환했다. 30명의 핵심 인력이 디자인, 제품개발, 품질관리, 마케팅 전략을 수립한다. 이렇게 해서 마 회장은 한국~중국~인도네시아를 연결하는 3각 채널을 만들었다. 제품개발과 마케팅ㆍ디자인은 서울에서, 제품 생산은 중국에서, 판매는 인도네시아에서 하는 글로벌 오픈소싱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마 회장은 인도네시아 시장 개척은 현지인에게 맡겼다. 그는 4~5차례 방문해 사회사업과 주요 현안만 결제한다. 모든 지휘는 서울 본사에서 이뤄진다. 오픈소싱 결과 용마의 경쟁력은 또다시 높아졌다. ◆ 인도네시아 유통채널 1개로 통일 = "처음부터 외상거래는 하지 않았습니다. 무조건 달러로 거래했습니다." 마 회장은 원화값 등락에 크게 신경쓰지 않는다. 처음부터 달러를 기본 통화로 정했기 때문이다. 더 중요한 것은 모든 거래가 선결제, 후납품이라는 사실이다. 처음 인도네시아에 물건을 판매할 당시 `공급자 파워`가 강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중국OEM업체와의 거래도 달러가 기본이고 현금으로 거래한다. 그만큼 OEM업체와 높은 협상력을 발휘할 수 있다. 용마제품의 인도네시아 수입상은 당초 10여 개에 달했다. 하지만 관리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마 회장은 2005년 단 1곳으로 통일했다. ◆ 프리미엄 브랜드 구축…사업분야 확대 = 마 회장은 한국기업이 만든 프리미엄 제품이라는 이미지를 강조하고 있다. 매직콤의 현지 시장점유율은 25%에 달한다. 50만루피아(약 7만원) 이상의 고가 제품의 시장점유율은 90%가 넘는다. 이 때문에 용마에서 생산한 고가 전자식밥솥은 인도네시아인들의 `혼수품 1순위`로 손꼽힌다. 전자밥솥으로 구축한 프리미엄 이미지를 앞세워 마 회장은 현재 선풍기와 냉ㆍ온수기, 정수기 분야로 시장을 확대하고 있다. 지난해 3월에는 매직콤 판매사인 `매직홈시스`를 설립했다. 프리미엄 브랜드의 이미지를 강화하기 위해 AS에 대한 서비스도 강화했다. `서비스회사`를 별도 법인으로 설립해 100여 명 전담요원이 40군데에서 애프터서비스를 제공한다. 올해는 본사 사옥도 신축할 예정이다. 지난해 매출은 3000만달러(약 360억원), 순이익은 70억원이다. 1년에 판매하는 밥솥만 160만개에 달한다. 마 회장은 3년 뒤 밥솥 매출이 300만개로 늘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포화상태인 한국시장에서 판매되는 밥솥은 160만~170만개. 이를 2억5000만명의 인도네시아 시장에 적용하면 연간 850만개의 밥솥이 팔리게 된다는 계산이 나온다. 이 가운데 30%(255만개)를 목표로 하고 있다. 마 회장은 "시장이 성숙해질수록 프리미엄 브랜드가 각광을 받게 돼 있다"며 "인도네시아 중산층을 공략한 뒤 동남아시아의 인근지역으로 시장을 확대해나갈 방침"이라고 밝혔다. ◆ 시장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응 = "전기밥솥 시장의 탄생에서 성숙에 이르기까지 한국시장에서의 경험이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지 몰라요." 마 회장은 "한국시장에서 전기밥솥이 걸었던 길을 이미 알고 있다는 사실이 인도네시아 시장 개척과 공략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며 "해외진출을 고민하는 기업들은 주저하지 말고 해외로 나와라"고 조언했다. 그는 "특히 한국시장에서 수십 년 전에 발생했던 일들이 동남아시아의 개발도상국가에서 현재 발생하고 있다"며 "한국기업들이 가진 선진 노하우라면 인도네시아에서 성공할 수 있다"고 밝혔다. 시장이 어떻게 변할지, 소비자 입맛에 어떤 변화가 발생할지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지혜롭게 시장변화에 대응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는 분석이다. 마 회장은 "인도네시아는 전 세계가 주목하는 잠재력이 큰 시장이다"면서 "15년간 많은 성과를 이루었지만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고 더 큰 도전정신과 열정을 강조했다. 인도네시아시장의 무한 잠재력을 향해 그는 오늘도 인도네시아 지도를 펼쳐 놓고 시장공략 방안을 강구하고 있다. ■ 마용도 회장은… 그는 대학 졸업 후 마마전자에 입사해 1979년 용마전기를 창업한 이래 `전기밥솥` 외길을 걷고 있다. △1971년 조선대학교 졸업 △1974년 마마 상무 △1979년 용마전기 설립, 1979년~현재 용마전기 대표이사 △1986년 연세대학교 경영대학원 졸업 △2000년 서울대 경영대과정 수료 △1979년 은탑산업훈장 수상 △2000년 무역의 날 3천만불 수출의 탑 수상 |
『리상의 꿈과 희망』이 이루어 지는 세계로! 안녕하세요! 대림대학 경영정보계열 겸임교수 정상덕입니다. 제 블로그를 찾아주신 여러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저는 지금 기업체강의(산업체강의)를 주로 하고 있고요, 대림대학 경영정보계열에서『회계학』강의를 하고 있습니다. 저는 『현대인재개발원』교수실에서 "수석교수"로 약 4년간(1995.3.25 ~ 1998.12.31) 근무한바 있으며, 대림대학에서 약 17년째(1993.8.23
2010년 5월 30일 일요일
인도네시아서 전기밥솥 1위 성공신화를 쓰다
2010년 5월 1일 토요일
대한민국 아파트의 미래 28부..욕망과 혼돈의 기록 도쿄 1991년
대한민국 아파트의 미래 28부..욕망과 혼돈의 기록 도쿄 199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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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아파트의 미래 28부..욕망과 혼돈의 기록 도쿄 1991년
대한민국 아파트의 미래 29부..은마 초고층 재건축, 빈집 대공포
<2007년 2월 4일 KBS스페셜 방영>
명품 브랜스 숍과 고급술집이 밀집해 있는 일본 도쿄의 긴자 거리
1980년대 이곳은 사치와 허영, 富에 대한 욕망이 한대 뒤섞여 흥정이고 있었다.
긴자 호스티스의 팁으로 수억원의 가게와 패물이 오가는 소설같은 일이 벌어지는 곳이
거품시절의 긴자였다. 그 거품의 중심에 부동산이 있었다.
영화 울트라맨, 고질라 등의 미술감독으로 최고의 명성을 쌓아온 스즈끼씨,
이제 사람들은 그를 개인파산자 스즈끼씨로 기억한다.
부동산 버블의 최전선에 있었던 부동산 버블전사 고지마 노부타카 그는 최고의 사업수완으로
총자산 8천억엔의 자산가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얼마후 일본 최고의 빛쟁이로 전락해 버렸다.
이들은 모두 같은 시기에 부를 이뤄냈고, 이들이 모두 파산하게 된것도 1991년 같은 해였다.
그들의 삶을 천국에서 지옥으로 반전시킨 1991년 과연 그들에겐 무슨일이
있었던 것일까...
현금 수백만엔을 우습게 쓰는 고지마씨의 배포에 시중은행들은 너도나도
돈을 빌려주겠다고 나섰다.
전성기 그는 도쿄시내 빌딩 70채를 소유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빌딩들을 전매해서 막대한 차익을 남겼다.
연간 매출액 5000억엔 순이익만 1500억엔이 넘었다.
늘어나는 그의 매출액 만큼 도쿄의 토지가격은 계속 높아만 갔다.
83년이래 일본의 땅값은 유래없이 급등하고 있었다.
그리고 일본인들은 벼락부자가 되는 꿈들을 꾸기 시작했다.
억센 행운의 사나이 고지마씨, 그도 거품시절 쌓아놓은 자산의 크기만큼
큰 타격을 받았다. 총 8개 은행에서 대출받은 돈이 고스란히 빛으로 남았다.
고지마씨에게 남은 것은 파산의 노년뿐이다.
그는 자신의 인생이 추락하기 시작한해인 1991년을 기억하고 있다.
1991년 그해 견고해 보이던 일본 거품경제의 바벨탑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85년 9월 미국은 만성적인 대일무역적자를 해소하기 위해 일본에 엔화절상을 요구한다. 플라자 합의를 통해 일본엔화는 1년새 2배로 급격히 상승하게 된다.
수출에 빨간불이 커진 일본정부는
5%대였던 금리를 2.5%까지 인하하게 된다.
국내 기업을 보호하기 위해 내려진 일본 정부의 저금리 정책이 3년넘게 지속되면서
시중에 돈이 넘치기 시작했다. 85년 3.8%이던 통화증가율이 88년 13%까지 증가하게
된다. 풀려나온 돈들은 고수익 투자처를 찾기 시작했고 곧 토지와 주식에 몰려들었다.
특히 일본사회에는 토지불패의 신화가 있었다.
오르기는 해도 절대 떨어지지 않는 다는 것이 에도시대부터 내려온 일본인들의
땅에대한 믿음이었다.
도쿄 중심부에서 시작된 부동산 붐은 도쿄외곽으로 확대되며 지가상승을 부추겼다.
이런 부동산 붐 뒤에는 시중은행들의 대출경쟁이 있었다.
부동산을 담보로 평가액의 120%까지도 대출이 가능했다.
도쿄를 포함한 나고야, 교토등 일본의 6대 도시 지가가 거품경기가 이어지는
5~6년동안 무려 5배까지 급등했다.
도쿄를 팔면 미국을 살 수 있다는 농담이 유행했다.
일본의 부동산 투기 광풍은 국내를 넘어 해외부동산에까지 확대되었다.
뉴욕의 심장 록펠러 센터의 인수는 제조업 중심의 착실한 수출국가 일본이
해외부동산의 큰손으로 등장하게된 상징적 사건이었다.
미국인들은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다.
일본의 대기업과 부동산 회사들은 명화시장에 뛰어들면서
명화의 가격이 폭등하기 시작했다.
큰손들에 의해 도쿄의 땅값이 춤추고 있는 동안 서민들의 내집마련 꿈들은
점점더 멀어져 가기 시작했다.
값싼 임대아파트 추첨의 당첨확률은 하늘의 별따기 보다 어려웠다.
도쿄집값 폭등으로 임대료가 폭등하면서 내집없는 서민들은 멀리 도시외곽으로
쫓겨나기 시작했다. 도쿄 위성도시들의 인구가 300만명이나 증가했다.
거품경제가 주는 이익은 모두에게 골고루 나누어지지 않았다.
서민들로부터 뭔가 잘못돌아가고 있다는 불만의 목소리가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모든 경제지표가 하향곡선으로 돌아섰다. 시중에 자금이 마르면서 주가가 곤두박칠
쳤고, 대출규제로 투기성 매물이 쏟아지면서 지가가 하락하기 시작했다.
일본의 1991년은 에도시대부터 믿어왔던 토지불패라는 신앙이 깨어진
한해로 기억된다.
거품붕괴는 맨 처음 버블전사였던 부동산업자들을 강타한다.
1991년을 기점으로 지가는 상승한만큼 크게 하락했다.
지가하락이 계속되면서 일본사회는 동요하기 시작했다.
부동산회사, 건설업체의 잇따른 파산은 은행들에게 엄청난 부실채권을 안겼다.
<파산>
<파산>
<파산>
<파산>
시중은행에 12조엔의 공적자금이 투입됬지만 연쇄부도를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파산>
<파산>
정부차원에서 채권회수를 위한 채권관리기구를 신설했다.
사금융들은 불법적인 방법으로 채권을 회수했다.
<야반도주>
부실채권으로 인한 은행들의 잇단 도산은
투기목적이 아닌 일반 대출자들까지도 피해자로 만들었다.
결국 담보로 잡힌 집들이 경매처분 당하고 개인파산자들이 급증했다.
허리띠를 졸라매고 모은 돈으로 내집마련의 꿈을 이룬사람들도
거품붕괴의 피해자가 되었다. 거품붕괴 그들의 소중한 집들은 깡통아파트로 전락했다.
일본경제의 기반이 무너졌다. 일본경제는 점점 깊은 경제침체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대규모 불황이 오면서 일본의 대기업들은 대량해고와 임금삭감을 통해 강도높은
구조조정에 들어갔다. 투기는 물론 내집장만을 엄두도 못냈던 서민들이
구조조정의 대상이 되었다.
1억 중산층 사회란 자부심은 이미 옛말이 되고 중하류 계층이
일본사회의 80%를 차지하게 되었다.
소득이 줄면서 서민들이 지갑을 닫기 시작했고 경기의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마이너스 성장이 계속되던 9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는 자살자 마져 급등하는 등
거품붕괴의 그늘은 깊어만 갔다.
<자살자의 급격한 증가>
<만약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더 빨리 금리를 올리고....>
<엔딩>
출처: KB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