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7월 22일 금요일

높은 공모가·낮은 성장성 합작품

높은 공모가·낮은 성장성 합작품

공모가 밑도는 삼성생명 주가 왜?


7월 14일 기준 삼성생명 주가는 9만4800원. 주당 1만5000원 이상 손해다. 더 화가 나는 것은 4% 후반대의 대출금리다. 상장 당시 회사에서 저리로 대출금을 알선해줄 때 금리는 3%였다. 그러나 금리가 계속 올라가면서 A차장 대출금리도 어느덧 4% 후반대로 올라섰다. 앉아서 1000만원 가까운 돈을 이자로 날리고 있는 데다, 3000만원가량 투자 손실을 보고 있으니 밥이 제대로 넘어갈 리 없다.



그중에서도 가장 속이 쓰린 것은 ‘앞으로도 별다른 희망이 없어 보인다’는 사실이다. ‘공모가 자체가 너무 고평가돼 있었다’는 말이라도 나올라치면 소화조차 안 된다. ‘절대 그렇지 않다’고 떠들 힘도 남아있지 않다. 삼성생명 주가가 상장 이후 공모가를 웃돈 것은 공모 이후 1년이 지난 지금까지 단 23거래일에 불과하다. 지금까지 최고가는 공모가보다 고작 5000원 높은 11만5000원이다.

A씨는 요즘 가장 부러운 사람으로 상장 직전이던 지난해 초 회사를 옮긴 동료 B씨를 꼽는다. 상장 당시만 해도 B씨는 간발의 차로 삼성생명 우리사주를 사들일 기회를 놓친 운 없는 사람으로 평가받았지만, 지금은 수렁에 빠질 것을 아슬아슬하게 피한 억세게 운 좋은 사나이로 인식된다.

A씨는 “지금 삼성생명 직원들에게 우리사주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계륵과 같은 존재”라며 한숨을 쉬었다.

우리사주 산 직원들 수천만원 손실

A씨뿐 아니다. 현재 삼성생명 우리사주조합이 갖고 있는 주식은 지난해 말 기준 969만여주로 4.85%에 이른다. 삼성생명은 1999년과 지난해 상장 시 두 차례에 걸쳐 우리사주를 배분했다. 1999년에는 액면가 5000원(현재 액면가 500원)에 나눠줬다. 그나마 그때 조금이라도 받은 직원들은 괜찮다. 1999년 이후에 입사해 이번 상장 때 처음으로 우리사주를 받은 직원들은 혜택은 전혀 없이 손실만 떠안은 셈이다.

2010년 5월 12일 상장한 삼성생명 공모가는 11만원. 희망 공모가 밴드는 9만~11만5000원이었다. 희망 공모가 밴드의 최상단에 위치한 11만원으로 공모가가 결정됐음에도 증시 사상 최대 규모인 20조원에 육박하는 청약 증거금이 들어왔다. 최종 경쟁률은 40.6 대 1에 달했다. 상장 첫날에는 시가총액 22조8000억원을 기록하며 금융 대표주인 신한금융지주(당시 20조5566억원)를 제치고 단숨에 시총 4위에 올랐다.

그러나 영광은 단 하루에 불과했다. 이후 주가가 계속 떨어져 7월 14일 현재 삼성생명의 시가총액 순위는 11위까지 내려왔다. 그뿐인가. 지난 1년간 코스피지수가 30% 가까이 오른 것을 고려하면, 삼성생명 주가는 상대적으로 40% 이상 빠졌다는 계산이 나온다. 명색만 ‘금융 대장주’일 뿐 ‘이름값’은 전혀 못 하고 있는 셈이다.

삼성그룹 금융 대표회사면서 은행을 제외한 한국 최대 금융사인 삼성생명이 왜 이렇게 ‘이름값’을 하지 못하는 것일까.

가장 먼저 ‘고평가 논란’이 대두된다. 처음부터 삼성생명 공모가가 높게 평가됐다는 얘기다. 삼성생명 주식 액면가는 500원. 결국 공모가 11만원은 110만원이라는 얘기다. 액면가 5000원짜리인 삼성전자 주가도 83만1000원(7월 14일 기준)이다. 상장 초기 고평가 논란이 거세지면서 ‘연기금이 펀드매니저에게 삼성생명 주식을 편입하지 말라고 지시했다’는 소문이 퍼지기도 했다.

익명을 요구한 C애널리스트는 “솔직히 ROE로 보면 삼성생명 주가는 말도 안 된다”고 귀띔한다.

ROE(Return On Equity·자기자본이익률)는 기업이 자기자본을 투입해 순이익을 얼마나 올렸느냐를 나타내는 지표다. 당기순이익을 자기자본으로 나눠 구한다. 투자자들은 ROE를 통해 기업의 사업 경쟁력, 수익 창출력, 주주가치 확대능력, 총괄적인 경영능력 등을 측정할 수 있다. 투자자에게 ROE는 은행 예금의 이자나 채권의 수익률 같은 개념이라 해도 무방하다. 예를 들어 ROE가 10년 연속 10% 이상 나온다면 지금과 같은 저금리 시대에 대단히 좋은 투자 자산이 된다. 일반적으로 ROE가 12%를 넘어야 투자적격 우량기업으로 간주한다. 금융회사는 적어도 정기예금 금리보다 높은 ROE를 유지해야 하는 게 불문율이다.

2011년 3월 기준(삼성생명은 3월 결산업체) 삼성생명 ROE는 4.26%에 불과하다. 박근희 삼성생명 사장이 상장 1주년을 맞아 진행한 기자간담회에서 “ROE 11~13% 성장을 달성하겠다”고 다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처럼 ROE가 낮은 것은 덩치에 비해 순익이 그리 높지 않기 때문이다.

삼성생명은 2010회계연도 1조9336억원의 순이익을 기록했다. 2009년의 9061억원보다 2배 이상 증가했다. 보험사 당기순이익이 1조원을 넘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사정이 다르다. 당기순이익이 급증한 것은 투자부문의 일회성 이익이 급증한 때문이다. 서울보증보험 자산유동화증권(ABS)을 상환하면서 대손충당금 4400억원을 돌려받았다. 국제회계기준(IFRS) 도입을 앞두고 4700억원어치의 유가증권을 매각한 것도 순이익에 잡혔다. 결국 보험 관련 이익은 전년과 비슷한 수준이다.

순익 낮아 ROE 4% 불과



7월 14일 현재 삼성생명 시가총액은 18조9600억원으로 19조원에 육박한다. 순이익은 1조원가량 된다. 삼성전자를 보자. 같은 날 기준 삼성전자 시가총액은 122조4057억원. 지난해 삼성생명 순이익은 16조1500억원이다. 삼성생명 시가총액은 삼성전자의 6분의 1이지만, 순이익은 삼성전자의 16분의 1에 불과하다. “삼성생명 시가총액이 너무 높은 것 아닌가, 결국 삼성생명 주가가 더 떨어져야 하는 것 아닌가”하는 주장이 나오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렇다고 별다른 돌파구도 없다. 한국 시장은 이미 포화상태에 다다라 더 이상 시장 확대가 어려운 형편이다. 박근희 사장이 신성장동력으로 ‘국외시장 확대’를 내세운 것은 국외시장 말고는 기대할 곳이 별로 없어서다. 그러나 삼성생명의 국외시장 개척에 의문부호를 다는 시선이 농후하다. 금융 부문 베스트 애널리스트인 D애널리스트는 “국내 생 보사가 글로벌 생보사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은 거의 NO”라고 했다.



박근희 삼성생명 사장
“금융업 자체가 폐쇄성이 매우 강한 업종이다. 잘 보면 글로벌 금융사로 성장한 기업은 미국, 영국, 네덜란드 금융사 정도에 불과하다. 일본도 못 했고 독일도 도이치방크와 알리안츠 정도를 빼면 전무하다. 한국 금융사가 글로벌 금융사가 된다는 건 논리적으로 가능해 보이지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라는 게 D애널리스트 분석이다. E애널리스트는 “애널리스트로서 삼성생명 주가를 얘기하기 참 곤란하다”고 토로한다.

“장기적으로 보면 그만 한 회사가 없다. 중요한 건 ‘장기적’이라는 단어다. 그렇다면 주가도 장기적 관점에서 봐야 한다는 건데 여기서 할 말이 없어진다. ‘지금 사서 한 10년 갖고 있으면 좋은 날이 올 것이니 사서 묻어두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2011년 7월 21일 목요일

‘네트워크 치과의사들의 양심고백문’

‘네트워크 치과의사들의 양심고백문’

'치과에서 입 한 번 벌리면 수백만 원은 기본’이란 말이 괜한 유언비어가 아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동아일보는 19일 대한치과개원의협회(이하 치개협)로부터 ‘네트워크 치과의사들의 양심고백문’을 입수, “필요없는 환자에도 과다 치료를 요구해 이득을 취했다”고 보도했다. 네트워크 치과는 의사 여러 명이 일종의 프랜차이즈 형태의 분점 치과 병원을 내는 대형 치과를 의미한다.

이 신문에 따르면, 그간 일부 치과에선 ▲임플란트 시술이 필요 없는 환자에게 무조건 발치를 권유하거나 ▲충치 위에 레진(치아 색이 나는 충전재)을 채워 넣는 의사 고유 업무까지 치위생사에게 맡기는 일이 잦았다. 또 ▲다른 사람의 치아에 사용했던 금을 재활용하거나 ▲금을 최대한 얇게 회 뜨듯이 뜨는 ‘사시미 인레이’ 시술 방식까지 사용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간 의혹만 무성했지만, 치과의 과잉 혹은 부실 진료 행위가 치과 의사들의 고백문에 대거 사실로 드러난 것이다.

이상훈 치개협 회장은 동아일보에 “네트워크 치과들은 싼 가격을 앞세워 환자를 끌어들인 뒤 필요 이상의 과잉치료를 해왔다”며 “의사와 치위생사 모두 환자를 치료할 때마다 추가 인센티브를 받는 시스템이기 때문에 과잉치료와 위임치료가 심각한 수준”이라고 말했다.

아울러 이 협회 관계자는 “그동안 네트워크 치과들이 의료법의 미비함을 교묘하게 이용해 왔지만 더는 시장 질서를 교란하는 행위를 지켜볼 수 없어 불법 치과의료 신고센터를 개설하고 네트워크 치과의 불법 시술 사례를 제보받고 있다”고 이 신문에 전했다.

하지만 네트워크 치과에선 일반 치과 개원의들도 우리와 시술 방식이 다르지 않다며 반박하고 나섰다고 이 신문은 전했다. 전국 110여 개 체인점을 갖춘 ‘U치과그룹’은 동아일보에 “단지 규모가 크다는 이유로 우리만 ‘마녀 사냥’을 당하고 있다”며 “그룹 직원을 총동원해 최근 전국 1500개 개원의를 직접 조사한 결과 무려 1500여 건의 불법 행위를 발견했다”고 밝혔다.

2011년 7월 19일 화요일

남성들이 '비키니 여성' 볼 때 가장 먼저 보는 신체 부위는?


남성들이 '비키니 여성' 볼 때 가장 먼저 보는 신체 부위는?

최종수정 2011.07.19 06:55기사입력 2011.07.19 0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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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 트랙 숍 (EyeTrackShop)


[아시아경제 온라인이슈팀] 비키니 입은 여성을 바라볼 때 남녀의 시선이 가장 먼저 꽂히는 신체 부위는 어딜까.

영국 데일리메일에 따르면 시장 조사기관 '아이 트랙 숍'(EyeTrackShop)의 연구진이 남녀 50명씩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남성은 얼굴, 여성은 몸매에 가장 먼저 시선을 두는 것으로 나타났다.

일반적으로 여성보다는 남성이 이성의 몸매에 관심이 더욱 많을 것으로 예상됐지만 의외로 남성들은 여성의 얼굴을 먼저 본 뒤 가슴과 허벅지 등의 신체부위로 시선을 옮기는 것으로 확인됐다. 반대로 여성의 경우 모델의 몸매를 먼저 본 뒤 얼굴, 이어 비키니 가격을 살펴봤다.

연구진은 이 같은 결과에 대해 "남성이 여성보다 약 40% 가량 여성의 얼굴이나 외형적 매력에 집중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며 광고에서 시선의 특징을 고려하지 않은 채 모델의 섹시 콘셉트만 강조할 경우 오히려 상품 판매에 역효과를 일으킬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지나가는 소가 웃을 ‘북한민생인권법’ 2011/05/31 22:50 추천 17 스크랩 4

지나가는 소가 웃을 ‘북한민생인권법’ 2011/05/31 22:50 추천 17 스크랩 4

http://blog.chosun.com/nkch/5586535

한나라당이 추진한 북한인권법에 맞서 민주당은 ‘북한민생인권법’을 제정하겠다고 나섰다.
북한인권법은 중국에서 떠도는 탈북자들을 돕고 북한 내 수용소 철폐와 민주화를 촉진하기 위한 법으로 동맹국 미국과 일본이 제정한 북한인권법과 유사하다.


북한 인민의 민생을 전혀 돌보지 않는 정권에 쌀과 돈을 퍼주어 민생과 인권을 어쩌겠다는 민주당 의원들의 발상은 참으로 기가 막힐 노릇이다.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두 원내대표



기본적으로 민생이라는 것은 민생을 책임진 국가의 책임이다. 아프리카 사막 국가처럼 초자연적인 조건으로 굶을 수 밖에없는 자연조건이 아니라면 이 지구 상에서 굶는 나라는 거의 없다. 심지어 10억의 인구를 가진 중국조차도 먹는 것이 남아돌고 있다.


마오쩌둥(毛澤東)의 광적인 우상숭배와 문화대혁명으로 중국 인민들의 삶은 황폐화됐고,굶어 죽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 민생을 돌보지 않는 마오 시대에 외부의 어떤 지원도 민생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다. 빈곤국가 중국이 민생을 해결한 것은 외부의 지원이 아니라 덩샤오핑(燈小平) 주석의 과감한 개혁ㆍ개방 정책으로 이뤄진 것이다.


구소련의 고르바초프나 덩샤오핑, 베트남의 호찌민 처럼 스스로 지도자가 변화의 길을 주도하면 희생 없이 많은 사람을 살릴 수 있다.


구 동유럽의 여러 국가는 사회주의 종주국 소련이 개혁ㆍ 개방을 요구하는데도 버티다가 끝내 자멸의 길을 걸었고, 독재자들의 말로는 처참했다.


지금 북한의 민생고는 김씨 왕조의 영구보전을 위해 국가를 폐쇄하고 변화를 거부하고 있는 데서 비롯되고 있다. 따라서 강력한 북한인권법을 만들어 북한정권을 민주화시켜야 대규모 지원으로 인민들에게 혜택이 돌아갈 수 있고 민생을 해결할 수 있다. 민주화가 우선이고 민생은 민주화된 정권이 알아서 할 일이다.



우리 대한민국은 민생고의 주범인 김씨 왕조를 제거하려는 북한인민들의 편에서 그들을 도와야 한다.
지금 민주당 박지원씨를 비롯한 종북적 사고를 가진 사람들은 민생에 관심 없는 폭군 김정일에게 쌀과 돈만 주면 민생이 해결되고 인권은 저절로 개선된다는 비상식적인 논리로 국민을 우롱하고 하고 있다.
북한인권법이 북한과의 대결을 심화시켜 평화를 침해한다는 것인데, 그 대결이라는 것은 김정일 집단이지 북한인민들이 아니다.


절대다수의 북한동포들이 지지하고 감격할 북한인권법을 반대하고 지난 10년간 이미 북한인권문제 해결을 역행하게 한 퍼주기를 다시 시작하겠다는 민생인권법은 북한인민들의 인권 해결을 가로막고 독재정권의 연장만을 가져올 반인민적, 반인륜적 범죄법안이라고 말할 수 있다.



김정일을 만나서 주민들의 인권문제에 대해 한마디도 못하는 자들이 남한의 과거 독재정권에는 입에 거품을 물고 있다. 심지어 이명박 정권을 독재정권이라 떠드는 사람들이 단 한 번이라도 김정일 정권을 독재정권이라 말한 적이 있는가 묻고 싶다.


민노당과 진보신당이 김씨 왕조의 3대세습에 관해 이견을 좁히지 못해 합당을 못한다고 하는데, 그런 정신나간 이정희 의원같은 종북 무리와 합당해서 도대체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가?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 인류의 모든 자유는 거저 이뤄진 것이 아니라 자유투사들의 피와 땀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쌀이나 퍼주고 민생인권을 이루겠다는 민주당의 사이비진보세력은 쓸데없는 민생인권법을 만들기 전에 기본적인 양심부터 가져야 마땅할 것 같다.


북한인민들의 고통을 외면하고 초보적인 연민도 느끼지 않는 사람들이 만든 민생인권법은 참으로 가소롭기 그지없다.

김정일이 치매에 걸렸을 가능성 2011/06/24 23:19 추천 11 스크랩 2

김정일이 치매에 걸렸을 가능성 2011/06/24 23:19 추천 11 스크랩 2

http://blog.chosun.com/nkch/5645841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김정일은 한동안 대남(對南)정책을 수립하지 못하고 표류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통령 선거 당시 김양건 노동당 통일전선부장을 서울로 파견하면서 민주당 후보를 밀었지만 결국 대참패로 끝나자 북한이 받은 충격은 엄청났다. 김정일은 노무현 정권 이후 한 번만 더 좌파정부가 들어서면 북한의 장기생존 뿐 아니라 적화통일도 가능할 것으로 예상했다.



요즘 북한에서는 군부의 아첨쟁이들만 챙기는 김정일 때문에 제대로된 정책이 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민주당 정권이 아니라 한나라당이 들어설 경우를 대비하지 못한 북한이 한동안 방황하다가 내린 결론은 이명박 정권과 끝까지 싸우겠다는 것이었다. ‘비핵·개방 3000’은 결국 북한이 추진하는 핵무기 보유를 저지하고 체제전환을 시도하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김정일의 편집증적인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적개심은 대남도발로 이어졌다. 천안함을 폭침하고 연평도를 포격하면서 남한 국민의 불안을 가중시켜 결국 그 책임을 한국 정부에 뒤집어씌우려고 했다. 남한에서 벌어진 쇠고기 촛불집회가 마치 자신들의 일인 양 노동신문에는 한동안 촛불로 도배되기도 했다. 이명박 정권을 흔들어 민심을 잃게 한 후 2012년에는 좌파정부를 다시 세우겠다는 김정일의 결심은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얼마 전 북한의 국방위원회가 남북 비공개 비밀접촉 사실을 공개하면서 남측이 정상회담을 구걸했다고 폭로하고 나섰다. 북한은 우리측 참석자들의 이름까지 모두 공개하며 국제 관례상 유례가 없는 결례를 자행하고 나섰다.


이번 사태의 책임은 물론 북한에 있지만, 북한의 대남전략에 대해 기본적인 파악을 하지 못한 우리의 책임도 크다.
김정일 정권이 천안함, 연평도 도발 이후 우리에게 보여준 메시지는 그들 말대로 이명박 패거리와는 끝까지 싸우겠다는 것이다. 이유 불문하고 북한에 무조건 머리 숙여야 남북관계를 풀겠다는 것으로 이명박 정권과 기(氣) 싸움을 벌이고 있다.


이런 연장 선상에서 정상회담을 위한 비밀접촉을 갖는다는 것은 김정일 정권이 우리를 오판하게 만들수 있는 빌미를 제공한 것이다. 이명박 타도를 꿈꾸는 김정일에게 천안함과 연평도에 대해 북한이 적당히 사과하면 정상회담도 하고 북한을 도와줄 수 있다는 발상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북한에 있다. 최고지도자의 정신 건강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이다. 이명박 정권과 끝까지 해보겠다는 일관된 생각은 좋지만 북한 내부 사정을 조금만 고려한다면 김정일은 지금 제정신이 아니다. 요즘 오락가락하는 북한의 대외정책은 모두 김정일의 비정상적인 결정에 의해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비밀접촉을 마구 까발리며 국제사회의 망신을 자초하는 북한은 사실 남측을 망신준다고 생각하지만, 진짜 망신은 자신들이하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 북한의 이런 망신적인 행동은 김정일의 편집증을 바로잡을 수 있는 그 누구도 북한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노동당통일전선부 최승철 부부장을 비롯한 오랜 협상 전문가들이 대거 숙청되고 대외연락부가 국가보위부 류경의 해외반탐에 밀려 한동안 역할이 축소되면서 북한의 대남정책은 혼선을 거듭하고 있다. 북한이 2012년 정권교체를 목표로 세우고 고통을 인내하고 있다면 우리가 어떻게 북한을 대해야 할지 답은 나와있다./nkch@chosun.com

"평양은 지금 심리적 무정부 상태" 2011/06/16 23:18 추천 9 스크랩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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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log.chosun.com/nkch/5626100

장진성/(사)북한전략센터 이사(시 <내 딸을 100원 팝니다> 저자)






어제 해외로 출장 나온 평양 출신 엘리트와 전화통화를 했다. 현재 중앙기관에서 근무하는 그는 나와 오랜 인연을 맺어온 믿음직한 소식통이다. 최근 북한 상황을 물어보는 나의 질문에 첫 마디가 “평양은 지금 심리적인 무정부 상태다. 더는 위엄 있는 정부도, 복종하는 시민도 없다”고 말했다.




구체적인 설명을 부탁하자 불쑥 이렇게 말했다. “평양의 지방화가 이미 시작됐다.” 나는 화들짝 놀랐다. 사실이냐고 거듭 물어보기까지 했다.




아마 남한의 북한학 학자들은 “평양의 지방화”라면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잘 모를 것이다. 북한에서 살아보지 않고서는 이해할 수도, 그래서 아무 감흥도 못 느낄 말이다.


북한에서 배급제란 통제를 넘어 정권의 존재를 과시하는 것이다. 때문에 김정일 정권은 그 상징성을 유지하기 위해 수도인 평양시민에 한해서는 반드시 배급을 주었다.




어떻게 해서든 평양만은 배급제도를 유지하여 그 정치지역 모델로 전국에 이념명분과 충성질서를 세우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 김정일정권은 평양정권으로 전락됐다.




배급소들이 이미 다른 용도의 창고로 방치 된 지방들에선 중앙의 지시가 전혀 먹혀들지 않았다. 군량미를 바치라면 자기들은 배급받는 평양시민이 아니라고 항의했고, 당 강연회에 모이라면 당장 먹을 쌀이 없다며 시장으로 출근했다. 배급이 전부였던 주민들이어서 복종의 식량이던 쌀이 항거가 되어 돌아온 것이다.




결국 지방부터 시작된 생존 시장은 전국으로 확산되면서 상징적으로만 존재하던 평양의 계획경제를 점령했고, 심지어는 수도시민의 자부심마저 붕괴시켰다.




반면 배급의 수도였던 평양은 상대적 속박감과 함께 그만큼 삶의 질도 떨어졌다. 평양의 지방화란 이런 무정부적 혼란과 민심이 평양에도 옮겨졌다는 뜻이다.




가장 큰 원인은 이명박정부가 들어선 후 대북지원이 끊기면서 평양시가 거의 2년 동안 시민들에게 배급을 주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직장에서 주던 배급표가 휴지처럼 되고, 화폐개혁 실패로 월급까지 무의미해면서 무너진 댐 마냥 기관이탈 인원이 크게 늘었다고 한다.




평양에서 추방시키겠다고 협박해도 어디가나 돈만 벌면 되지 하는 반발의식에 좀처럼 먹혀들지 않는다고 한다. 간부들까지도 제 살 구멍을 찾느라 중앙기관이 밀집된 평양은 그야말로 부패와 비리의 아성이 됐다고 한다.




평양까지 이 정도 와해되니 김정일은 독재자라고 하기엔 무색할 만큼 초라해졌다고 한다. 뒤늦게 시장에 뛰어든 평양시민들은 돈 벌 개인궁리만 하고 앉아 있는데 김정일의 지시들은 아직까지도 수도건설, 군대지원, 혁명정신과 같은 옛 말 같은 집체주의를 강요해서 더욱 현실성이 떨어진다고 한다.




더욱이 김정은 3대세습 선언은 장기정권에 익숙 된 주민들에게 정권변화 가능성이라는 새로운 인식을 주어 충성도를 크게 추락시킨 계기가 됐다고 한다. 그래서 김정일은 숙청도 예전처럼 제 멋대로 할 수 없는 처지라고 한다.




얼마 전 국가안전보위부 부부장 류경을 숙청 할 때에도 과거 같으면 그의 연고자들까지 찾아 싹쓸이 했겠는데 부부장 외 1명을 처벌하는 것으로 끝낼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 이유는 평양시 배급이 중단되면서 기관 자체 식량 해결을 허용한 결과, 그 사이 기관이기주의라는 새로운 개념의 결속력이 생겨서라고 한다.




얼마 전 통일부가 북한은 남북대화 중단으로 매해 5억달러의 손실을 보고 있다고 했는데 내 생각엔 50억 달러가 더 넘는다고 본다. 북한체제가 얼마나 취약하면 이명박 정부 2년에도 이렇게 휘청거린다.




대북지원 단체들은 대북지원 중단으로 대량아사 현상이 다시 발생한다고 하지만 이는 북한 실정을 왜곡하는 것이다. 시장이 없을 때와 있을 때의 북한 상황은 전혀 다르다.



한 달 내내 출근해서 배급을 받느니, 차라리 시장에서 2, 3일 뛰면 그 돈으로 쌀을 사 먹을 수 있는 것이다. 이제는 우리 국민의 대북지원 관점이 바뀌어야 한다.




대북지원 쌀은 주민식량이 아닌 통치식량이다. 외부지원이 차단되면 오늘날의 아사자는 북한 주민이 아니라 김정일 정권이 된다. *

김현희가 해야 할 역사적 사명은? 2009/03/11 17:31 추천 155 스크랩 18

김현희가 해야 할 역사적 사명은? 2009/03/11 17:31 추천 155 스크랩 18

http://blog.chosun.com/nkch/3780999

대한항공 858기를 폭파한 김현희씨에 대해 북한에서는 마유미로 잘 알려졌다.
당시 노동신문 등 북한의 선동 매체에서는 남조선 안기부가 마유미를 만들어냈다고 주장하면서 KAL기 폭파사건은 북한과 아무런 연관이 없는 사건이라고 했다.



하지만 89년 당시 평양의 친구들을 만나면서 마유미에 대한 은밀한 소문이 평양의 중심가에서 돌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김일성종합대학이나 외국어 대학 등 고위층 자녀들이 몰려 있는 대학가를 중심으로 마유미는 우리사람(북한)이고 남조선의 88올림픽을 방해하기 위해서 단행한 성공적인 공작이었다는 내용이다.



납치 일본인 가족 다구치씨의 아들과 상봉하고 있는 김현희씨



이미 평양의 웬만한 학생들은 마유미가 김현희 임을 다 알고 있었고 그녀가 다녔다는 평양 외국어대학에서도 그의 실체를 아는 사람들이 많았다. 김현희가 독약을 먹고 사망했다면 누구도 알 수 없는 비밀이겠지만 이미 김현희를 아는 북한사람들은 너무 많다.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도 KAL기 사건이나 아웅산테러는 북한이 자행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북한에 있을 때 김일성과 김정일이 핵심간부들과 대외사업을 논의하는 자리에 있었는데 당시 김정일이 한 말을 소개한 적이 있다.



비행기 폭파나 아웅산 테러와 같은 대외공작은 김정일이 진두지휘했고, 국제사회의 압력이나 나쁜 결과에 대해 우려하는 김일성 앞에서 김정일은 “딱 잡아떼면 그만이다”고 말했다고 한다.



북한에서 대외적 주요 업무는 모두 최고 지도자의 결정에 의해서만 이뤄지게 돼 있다. 지도자의 승인 없이 그 어떤 일도 할 수 없다.


당시 대남 사업을 주도했던 김정일이 굵직한 사건들을 직접 챙긴 것은 북한에서는 상식적인 일이다.



진실이 증명해주는 KAL기 사건에 대해서 지난 정권은 이 사건의 진실을 왜곡하려고 했다. 일부 단체들은 아예 김현희를 가짜로 몰기도 했고, 김현희는 살인범이니까 죽은 듯 살고 있으라는 협박에 시달리기도 했다.



KAL기 폭파 사건의 책임자는 김정일이고 대남첩보조직인 35호실이 기획하고 시행한 사건이다. 김현희는 말단 공작원일 뿐이고 공작에 실패할 경우 독약 샘풀을 깨물고 죽어야 하는 운명이었다. 김현희는 어릴 때부터 세뇌교육을 받았고 그 공작교육이라는 것은 그 어떤 이념이나 상황판단을 할 수 없게 만드는 악랄한 것이다.

그래서 김현희 역시 김정일 정권의 피해자일 뿐이다.


그가 폭파 현장에서 집적 임무를 수행했다고 해서 그를 살인자로 모는 것은 북한의 사정을 너무 모르고 하는 것이다. 당시 김현희는 조국과 수령을 위해 목숨 바치고 적들을 제거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판단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1989년도 요덕 수용소에 수감됐던 안혁씨는 수용소 완전통제구역(한번 들어가면 영원히 나올 수 없는 구역)에 마유미의 가족이 수감됐다는 소문이 돌았다고 증언한 바 있다. 이는 단순히 소문이 아닌 사실이다. 요덕 수용소 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은 보위원들의 입을 통해서 전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 북한에서 김현희는 당과 수령을 배반한 ‘역적’일 뿐이고 그의 가족은 역적의 가족으로서 평생 나올 수 없는 수용소에 수감됐다.


김현희가 살아있는 한 김정일은 발 편 잠을 잘 수 없다.
정치범 수용소에서 많은 사람을 학살한 죄는 덮을 수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비행기를 폭파시켜 무고한 동족을 살해한 ‘죄’는 반드시 물어야 하기 때문이다.



김현희가 은둔생활에서 벗어나 북한 동포들과 희생된 유가족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김정일 정권의 만행을 폭로하고 북한인권과 민주화 운동에 앞장서는 길뿐이다. 멀지 않는 장래에 김정일 정권이 역사 앞에 심판받는 날에 김현희는 남북한을 통틀어 가장 큰 사건인 KAL기 사건에 대해서 죄인 김정일을 심판하는 증인으로 출석해야 한다.

장마당 스토리 2006/07/20 00:20 추천 4 스크랩 10

장마당 스토리 2006/07/20 00:20 추천 4 스크랩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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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탈북자가 북한에 있을 때 참담했던 경험을 수기로 쓴 글을 옮겨 실었습니다.





탈북자 : 김운주



구름 사이로 햇살이 비치는 초봄이다. 오늘도 장마당으로 향한다. 장마당을 구경하는 것이 북한에선 가장 흥미로운 일이다. 물건 파는 사람, 단속하는 안전원(경찰)소매치기 소년들, 꽃제비들로 인산인해를 이룬 장마당은 참 볼거리도 많다.



무엇보다 사람구경이 제일 재밋다. 담배파는 할머니들, 떡 보따리 밑으로 손을 뻗어 떡을 훔치는 꽃제비들과 고함을 지르는 아낙네들, 생존 현장 그 자체다. 언제부터인가 기차역과 장마당 근처에는 몸파는 여자들까지 서성거린다.



지금 내 주머니에 단돈 백원이 있다. 월급 2천원(한국돈으로 환산하면 천원이 좀 못된다.)을 손에 쥘 때마다 1천900원은 장농 속에 넣어두고 백원 만 시장에 들고 나온다. 돈을 쓰기 위해서가 아니다. 장마당에 들어서면 백원도 없어 몇 달 전에 굶겨 죽인 아내와 딸에 대한 추억이 간절해지기 때문이다. 아 돈, 돈이 없어 먹을 것을 사 먹이지 못해 나는 그 귀한 생명들을 언 땅에 묻었다. 아내에게는 예쁜 옷을, 딸애에게는 그렇게 졸라대던 밀가루 빵을 사주는 것이 소원이었건만...




목숨이 질긴 탓에 홀로 살아남은 게 웬수 같아서 언젠가는 양잿물을 사려고 나왔던 적도 있는 그 장마당이다. 나는 특히 아이들 옷이나 장난감 파는 매점에 오래 서 있는 버릇이 있다. 그때마다 장사꾼들은 나를 보면 “쌀이 있는가?” 혹은 식용기름이 있으면 물건과 바꾸어주겠다고 서로 싸워가며 매달린다.




그들이 나에게 매달리는 것은 나의 시누런 군복 때문이다. 먹을 것이 없어 하루에도 수백명씩 굶어죽는 난리판이지만 당 간부들과 군대만은 식량배급이 정상적으로 공급되고 있었다. 그래서 군복 입은 사람들이 시장에 나오면 쌀을 팔려고 나오는 것으로 아는 것이다.




군복을 벗고 여기로 왔을 걸 하는 후회 때문인지 나는 그들의 팔을 신경질적으로 뿌리쳤다. 왜냐면 나는 가난한 군인이기 때문이다. 군복 입은 지 석달도 채 안돼 자기 잎에 풀칠도 하기 힘든 사람이다. 가족을 다 잃고 난 후 중앙에서 간부로 일하는 먼 친척 되는 사람이 인민군 총참모부에 줄을 대어 배급이라도 타 먹고 살라고 입혀준 군복이었다.




다행히 해양학 전공의 대학 졸업증을 가지고 있어서 ‘빽’만 있으면 바보도 출세하는 나라인지라 국방연구소에 중위 계급으로 입대할 수 있었다. 그런 나에게 쌀을 달라고 하다니, 나도 바로 몇 달 전에 처와 자식까지 굶겨 죽인 짐승 같은 놈이라고 그들에게 버럭 소리 지르고 싶었다. 그래서 오늘은 가족 생각이 더 간절해져서 과거를 돌이켜 볼만한 것을 하나라도 사야지 견디기 어려웠다. 뭘 살까.




나는 갑자기 허둥대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던 나에게 한 장사꾼이 들고 있는 빵이 보였다. 딸애가 그처럼 먹고 싶어 하던 밀가루 빵, 그 앞으로 다가간 나는 품속에서 돈을 꺼내며 얼마인가 성급하게 물어보았다. 장사꾼은 마침 백원이라고 대답했다. 빵이 든 봉지를 만져보니 아직도 따뜻했다. 순간 그 온기가 가슴으로 스며들며 나의 두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아버지가 굶어서 눈만 말똥이는 어린 딸에게 빵 한조각 사먹일 수 없었던 그 참담함이 다시 피부로 느껴져 견딜 수가 없었다.



백원을 든 손이 금방 떨렸다. 나는 미안하단 말을 던지고 도망치 듯 그 자리를 피했다. 피하면서 빵을 만졌던 손을 힘주어 움켜쥐었다. 그 힘이 그대로 어깨에도 미쳤는지 사람들이 내 몸에 부딪치며 신경질을 내며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겹겹이 막아서는 인파를 뚫으며 시장출구로 향했다. 그런데 얼마 못가 도저히 전진할 수 없는 사람 장벽에 막혀버렸다. 키 돋움을 해서 앞을 보니 가운데는 텅 비워 있는 것 같았다. 아마 또 어떤 장사꾼이 기발한 아이디어로 구경거리를 만든 모양이었다.



버릴 것이 하나도 없는 조선에는 시장에 별의별 구경할 것이 다 있었다. 누구는 빈 깡통으로 기름등잔을 만들어 팔았고 누구는 담배꽁초를 주어 담배 힐터를 솜 대신 넣은 이불도 만든다. 풀죽도 먹기 힘든 나라여서 일명 송기떡이라고 하는 소나무 껍질로 만든 떡이며, 느룹나무 껍질을 말려 가루 내어 만는 누룹국수 등 아이디어 식품들이 넘쳐난다. 심지어는 세숫물도 판다. 전기가 없어 도시에 물 공급이 제대로 안되기 때문에 맹물도 상품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시장 어디가나 세숫물은 5원, 세수 비누는 십원, 이런식으로 셋트를 맞춰 장사를 한다. “세수하고 가세요” 하며 소리치는 여인들의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린다. 나는 길이 열릴 때까지 참아 보려고 했지만 사람들의 땀 냄새와 장마당 구석의 오줌 찌린내와 오물냄새 때문에 더 참을 수 없었다. 하여 군인 흉내를 내며 거친 말투와 우직스런 몸동작으로 무작정 헤집고 앞으로 나갔다. 어찌나 빼곡히 몰려있었던지 내가 한번 움직일 때마다 그 모든 사람들이 다 흔들거리는 것 같았다. 마침내 땅이 보이는 곳에 선 나는 이마의 땀을 씻을 새도 없이 눈앞의 광경에 굳어지고 말았다.




시장 한 가운데 누더기 옷을 입고 뼈가 앙상한 여인이 서 있었는데 그의 목엔 다음과 같은 종이장이 걸려있었다. “내 딸을 백원에 팝니다.”




그 여인 옆에는 6살쯤 돼 보이는 여자아이가 죄진 것처럼 머리 숙이고 앉아 있었다. “이 여자가 미친 것이 아닐까?” 자식을 버리거나 남에게 주는 사례들은 많이 듣고 보아 왔어도 이런 거짓말 같은 상황은 처음 목격했기 때문이다. 자식을, 그것도 빵 한 봉지 값에 팔다니, 모여선 사람들도 나와 같은 생각으로 너나없이 저주를 퍼부어댔다.

“저 년 완전히 미쳤어”

“아무리 먹고 살기 힘들어도 자식을 어떻게 팔어? 굶어죽어도 같이 죽어야지”

“생긴 건 바람둥이처럼 매끈한게 애를 팔다니”

“세상이 흉흉하더니 요즘 별의별 놈들을 다 보겠구만”

어떤 사람이 “애 엄마가 맞긴 맞아” 하며 소리치자 한 노인이 여자애에게 물었다.




“애야, 저 여자 정말 네 엄마냐?”

그 목소리에 모두가 입을 다물고 아이의 얼굴을 주시했다. 아이가 선뜻 대답을 않자 엄마가 아니라는 대답을 듣고 싶었던지 여러 사람들이 다그치듯 다시 물었다.

“야, 네 엄마 맞어?”

“네 엄마 아니면 아니라고 말해”

“우리가 있으니깐 일없어, 어서 말해”



쭈그리고 앉아있던 아이가 마침내 비실비실 일어섰다. 삽시에 주위는 조용해졌다. 내 옆에서 자꾸 온 몸을 굵던 사람도 그 때만은 손을 까딱 안했다. 두려운 눈길로 주위를 둘러보던 여자아이는 사람들을 향해 “맞아요. 울 엄마예요” 라고 소리쳤다.

울 엄마? 그렇게 말하는 딸애를 돈 백원에 파는 어미라니. 사람들의 분노는 한 충 더해졌다.

“저런 저런, 애가 불쌍하구나”

“야 쌍년아 아이를 팔겠으면 제대로 팔아라. 백 원이 뭐니”

“개도 삼천 원인데 딸이 개 값도 안 되냐!”

“제 입도 풀칠하기 힘든 세상에 누가 돈 주고 아이를 갖다 기를 사람이 있겠다고 저 지랄이야”

“그러게나 말이지. 차라리 아이를 키워달라고 사정하면 동정이라도 받겠다”

“백원으로 부자 되겠냐 미친년아!”



그 소리들은 고함에 가까웠지만 여인은 두 눈을 내리 깔고 미동도 없었다. 그게 더 미웠는지 사람들의 욕은 더 거세져 돌이라도 던질 기세다.

누군가 “야! 할 말 있으면 어디 변명이라도 해봐. 저거 벙어리 아니야”라고 하자 이번엔 욕질보다도 벙어리라는 말들이 여기저기서 들렸다.




내 보기에도 그 여인은 정말 듣지도 못하고 말도 못하는 벙어리 같았다. 그때부터 다른 사람들도 저 여자, 저 여자라는 말 대신 저 벙어리라고 손가락질 하면서 서로 수군들 거렸다. 벙어리에게 아무리 욕을 해봤자 소용없겠다 싶었는지 누군가 이번엔 큰 소리로 아이에게 아버지가 없냐고 물었다. 또다시 시장 안은 조용해졌다. 아버지라도 있었으면 하는 하나같은 기대감에 어찌 보면 모두들 긴장한 듯싶었다. 아이는 좀 전보다 더 가냘픈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지요? 없시요. 먹지 못해서 영양실조로 죽었....” 말끝을 흐렸다.



여기까지 맥없이 중얼거리던 아이가 갑자기 머리 들며 또렷한 음성으로 소리쳤다.

“우리 엄마 욕하지 마세요. 울 엄마 지금 암에 걸려서 죽으려고 해요.”

비명처럼 들리는 아이의 그 소리는 사람들은 머리에 돌 맞은 것 처럼 뗑 해졌다.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죽음보다 이제 곧 죽어야 할 삶을 볼 때가 더 침통한 법이다. 그 여인을 보니 이 세상 마지막 시간을 보는 것 같았다. 목소리라도 가지고 있다면 모든 사연을 쏟아 놓으며 통곡이라도 해보겠는데 그렇지도 못하는 것이 오죽하랴싶어 사람들은 더더욱 처량하게 벙어리 여인을 지켜보았다. 왜 여태 그를 한 번도 동정하려고 하지 않았던가.




“내 딸을 백원에 팝니다.” 그 글만 보고 왜 사람은 보려고 하지 않았던가. 어찌 보면 그 글로서 남들에게 더 동정과 배려를 받아보려는 모성의 최후 몸부림일 수도 있다. 나는 이런 생각으로 비로소 여인과 여자애를 유심히 뜯어보았다. 엄마가 죽는다고 야단치는 딸애의 목소리에도 덤덤히 서있기만 하는 벙어리 30대 여인, 누렇게 떠 있는 얼굴은 이미 삶을 포기한 듯 아무런 표정이 없었고 뼈가 마디마디 들여다 보이는 손에는 피도 흐르지 않는 것 같았다.




옷은 그동안의 고단한 생활을 보여 주 듯 여기저기 기운 흔적이 보였는데 바느질 솜씨가 깔끔했다. 신체장애가 있는 사람들은 손재간이 좋다는 말이 생각났다. 아이도 엄마를 닮아 미운 구석이 없었다. 갸름한 얼굴, 쌍까풀진 두 눈, 오똑한 코, 작은 입술, 이렇게 흩어보던 나는 아이의 입술 밑에 난 작은 점을 보고 흠칫했다. 내 딸애에게도 그 자리에 그런 작은 점이 있었다.




보이지 않는 곳에 점이 있어야 복이 되고 보이는 곳에 있으면 화가 된다는 동네 어르신의 말 때문에 늘 가슴에 걸렸던 딸애의 흔적이었다. 그래서 처녀애의 불행이 남의 일 같지 않았다. 나는 딸애를 먼저 보냈는데 저 애는 아빠를 먼저 잃었구나 하는 생각에 동변상련의 아픔이라 할까. 언젠가 만났던 인연 같기도 했다. 어쩌자고 혹시 내가 저 애를 키울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욕구까지 솟구쳤다.




그러나 나는 일부러 머리까지 흔들며 그 모든 생각을 말끔히 털어 버리고 싶었다. 남을 동정하기엔 내 자신이 너무도 불행한 죄인이었던 것이다. 남들도 나와 비슷한 생각들을 해보는 것인지 한마디 씩 동정하기 시작했다.




“저 여자 죽으면 애는 정말 어찌 사노”

“엄마도 살고 애도 살면 얼마나 좋을까”

“친척 중에 아이를 돌볼 사람이 없을까?”

“에구 저거 불쌍해서 어쩌노”



그들 중 장사꾼으로 보이는 사람 하나가 모녀 앞으로 다가갔다. 장사꾼은 5백원을 꺼내 여인의 손에 쥐여주고 대신 목에 걸린 종이장을 벗겨내며 말했다.

“아주머니, 요즘 누구나 먹고 살기 힘든데 남의 아이를 돈 주고 데려다 키우겠다는 사람이 없어요. 그러니 이 돈 가지고 가시우”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여기저기서 공감하는 소리들이 연발했다.

“맞아요. 그 사람 말 들어요.”

“어서 그렇게 해요. 여기 나와 있어야 병이나 더 심해져요. 엄마가 살아야 아이도 살지요”

“날도 찬데 아이 데리고 어서 가요.”

나는 그 말들이 고마웠다. 그리고 그 순간 만큼은 여인의 병을 고칠 수 있는 약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그 소리들을 못 들어서인지 아니면 듣고 하는 행동인지 벙어리 여인은 장사꾼의 손에 돈을 돌려주고 글을 다시 목에 걸었다.




오백원보다 애를 부양해주는 게 더 고맙겠다는 마지막 사정 같기도 하고 자기는 그 돈에 살아날 목숨이 아니라는 의미 같기도 했다. 이때 갑자기 “비켜! 비켜!” 하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사람들을 마구 헤치며 나타나는 사람이 있었다. 안전원(경찰)이었다. 누구의 신고를 받고 왔는지 목적하고 온 듯 여인에게로 곧장 다가와 다짜고짜로 어깨를 툭 툭 쳤다.




“이 년이 미치지 않았어! 여기가 사람을 노예처럼 사고파는 썩어빠진 자본주인 줄 알어? 당장 없어지지 못해!”

그러면서 여인의 목에서 종이장까지 획 잡아채어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그 한 조각 한 조각이 땅 바닥에 뿌려질 때마다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동정이 증오로 바뀌는 군중심리가 쌓여져 사람들이 폭발하기 시작했다.



“여 이 사람아. 그 여인 중병 걸린 사람인데 사정이나 좀 들어보고 그 야단을 치지”

숱한 사람이 모여있어 누가 그런 소리를 했는지 잡아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자 여기저기서도 비난하는 소리들이 터졌다. 그들을 모조리 잡아갈 듯한 기세로 안전원이 사방을 일일이 둘러보자 그 면상을 쥐여 박기라도 하듯 이번엔 누군가 야유조로 소리쳤다.



“ 저런 새끼는 100원에 내놔도 냄새나서 사가는 사람이 없을게다”

순간 시장 안은 와! 하는 웃음판으로 변했다. 분노로 얼굴이 험하게 이그러진 안전원은 그 자리에 더는 서있을 수 없었던지 벙어리 여인에게 달려들어 분풀이를 하기 시작했다.




“가자. 인간중심의 우리식 사회주의에서 이런 짓은 공화국을 모독하는 죄야. 어디 네 새끼까지 없어지고 싶어서 그래?.”

팔소매까지 걷어 올리고 안전원이 여인을 무섭게 잡아끌자 아이가 울음 절반 애걸 절반으로 사정하기 시작했다.




“아저씨. 우리 엄마 아파서 그래요. 제발 놔주세요. 엄마 가자. 엄마 죽을 때 나도 같이 죽으면 되잖어. 나 혼자 안살거야”

엄마랑 같이 죽겠다는 아이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나는 아내와 딸의 죽음을 보는 착각과 함께 온 몸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나만의 불행이 아니라 이 나라 인민이라면 누구에게나 다 있는 불행, 이런 불행의 나라를 금방 저 놈은 인간중심의 사회라고 했다.




노예제도 때도 사람은 사람 값으로 당당히 팔렸다. 그러나 백원에도 팔릴 수 없는 노예보다 못한 목숨들이여서 저 놈은 저렇게 지금 마구 대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모녀에 대한 동정도 동정이지만 그 놈의 행위가 얄밉기도 하여 벙어리 여인에게 다가가며 큰 소리쳤다




“이보시오. 내가 아이를 데리고 가겠소. 나에게 돈 백원이 있소”

내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뭐야!?” 하면서 나에게 머리를 돌리던 안전원은 나의 군복을 보고 뚝 굳어졌다. 안전원도 군인은 두려운 존재여서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여인의 손에 돈을 쥐어주며 나는 간절히 말했다.

“이 백원으로 당신 딸을 산다기보다 당신 모성애를 사는 것이니 그렇게 아시오”




그리고 그 말을 시각적으로 확인시키기 위해 딸애의 여린 손목을 확신있게 잡았다. 내가 당장 데려 가려는 줄 알았는지 여인이 반사적으로 내 팔을 성큼 잡고 안절부절 못하다가 갑자기 사람들을 밀어내며 어디론가 급히 갈려고 하였다. 처음 그의 행동을 이해 못하던 사람들이 이내 그에게 길을 열어주었다.




나도 벙어리 여인의 돌발적인 행동이 몹시 의문스러웠다. 내가 마음을 다시 고쳐 먹을까봐 아이를 버리고 서둘러 달아나는 것인가. 정말 그렇다면 그 여인은 너무 어리석다. 혹시 어리석어서 제 아이를 정말로 백원에 팔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그 돈으로 양잿물이라도 사서 자살이라도 하려는가?. 나는 같은 혈육의 생각을 읽어보기 위해서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 보았다. 아이도 당황한 듯 싶었다. 그러자 내가 너무도 큰 결심을 쉽게 한게 아닌가 싶어 조금 긴장 되었다.




결국 사람들이 붐비는 그 속에서 모녀는 사라졌다. 진짜 암에 걸렸는지 빵 한조각을 얻기 위해 딸을 이용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북한도 이젠 갈데까지 다 갔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이 무리로 굶어죽으면서 인육까지 먹었다는 소문이 돌고 장마당에서도 팔렸다는 끔찍한 이야기를 들은 적은 있지만 살아있는 사람을 팔겠다고 나선 것은 처음 목격했다.

하지만 다시 내 자신이 너무 초라해 졌다. 차라리 안해와 딸을 굶겨죽인 나보다는 훨씬 용감한 사람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내가 저런 것을 목격하면서 놀랄 처지가 아니지 않는가?

그래 나처럼 가족을 굶겨죽인 사람이 한두명이 아니지...다 잘못된 사회 때문이지 어찌 나 때문에 그렇게 됐겠는가 생각하면서도 못난 아버지라는 사실에 살고 싶지 않았다.

[수기]두만강가에 나의 인생을 묻었다 2009/12/21 10:55 추천 14 스크랩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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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자 정은하





1. 병마에 너무도 고통스러워 죽여달라고 했지만…

끊임없이 이어지며 대한민국으로 찾아오는 탈북자 수는 올해로 2만을 채워가고 있다. 고향과 부모, 형제를 등지고 죽음의 고비를 넘어 이곳에 이르기까지 2만 여명의 탈북자들이 걸어온 인생행로는 저마다 각이하다.

누구는 배고픔을 참을 수 없어 누구는 감옥행을 가기 싫어 또 누구는 자유를 찾아서 각 자 서로 다른 이유로 이 길을 택했지만 우리들 모두에게는 꼭 같은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즐겁게 웃고 떠드는 순간에도, 행복으로 가슴 벅차는 순간에도 마음 한구석에 깊숙이 자리 잡힌 채 결코 지워지지 않고 끊임없이 자아를 괴롭히는, 사랑하는 고향땅에 대한 그리움과 추억들이다.

탈북자 누구나 그렇듯 나 또한 떠나고 싶어 떠난 땅이 아니며 넘고 싶어 넘은 두만강이 아니다. 그러나 아무리 있으려 해도 더는 견딜 수 없어 그 땅을 떠나올 수밖에 없었던 나이고 우리들이다.

암담한 마음으로 삭막한 두만강 가에 서서 뒤편에 펼쳐진, 칠 흙 같은 어둠속에 묻혀 불빛 한 점 보이지 않는 내 고향을 뒤 돌아볼 때 내 마음속에도 음산한 어둠만 가득 찼고 눈앞에 펼쳐진 두만강 건너 중국 땅에서는 온갖 미련 다 버리고 어서 오라 수천 수 만개의 아름다운 불빛들이 손짓하며 명멸하고 있었다.

그 날 나는 뒤에 남겨지는 그 땅에 지나온 내 인생의 모든 것을 묻어 버렸다. 순진하고 행복하기만 했던 어린 시절과 처녀 시절, 불행과 슬픈 상처만을 가슴속에 남겼던 결혼생활, 또 다른 고통의 연속이었던 10년간의 독신생활, 결핵병원의 사체실 옆 지옥 같은 방에서 목구멍을 넘어 수돗물처럼 쏟아져 플라스틱용기에 가득 차던 피를 볼 때마다 전율하며 삶과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었던 그 순간들...

고통에 몸부림치며 차라리 그냥 죽게 내버려 달라고 눈물 흘리던 내 손을 잡고 죽으면 안 된다고, 용기를 내라고 힘을 주던 고마운 의사선생님과 운신도 못하던 내 몸을 엄마처럼 닦아주고 지켜주던 21살의 간호사 처녀들, 죽음의 고비를 넘어 일어섰을 때 그럴 줄 알았다고, 의지가 강한 사람은 쉽게 죽지 않는다며 격려해주던 고마운 분들...

함께 기뻐하고 함께 아파하며 고통과 슬픔의 바다를 헤쳐온 내 어머니와 형제들, 고마운 분들 그 모든 것을 다 잊고 싶었다. 아니 잊으려 하고 지우려 해도 뜻대로만 되지 않는 그 모든 것들을 두만강 가에 선 그 순간에만은 지워버렸었다.

달빛이 어린 두만강 물에 섞여 엄마에게 울부짖던 내 말소리가 들린다. ‘혼자서 죽도록 고생했어도 견뎌 냈는데 내 엄마, 내 형제한테 와서 이렇게 병에 걸렸어. 이럴 줄 알았으면 집에 오지 말것을...’ 한 달간의 줄 기침 끝에 결핵이라는 진단을 받고 통곡하며 뱉는 내 말에 억이 막힌 엄마는 미처 말도 못했다.

홀몸으로 온기 한점 없는 한산한 숙소에서 추위에 온 몸을 떨다가 얼음같은 몸을 이끌고 직장으로 출근하느라 정신없이 살던 그 때 이미 병이 온 것을, 기댈 곳이 없어 아파도 쓰러지지 못했던 육체가 엄마랑 혈육에게 왔으니 맥이 놓여 그리된 것을 엄마 탓, 형제 탓 하다니... 생각하면 내 병 치료 때문에 고생하던 엄마와 동생, 조카들 생각에 미안하고 안쓰럽다.

이가 다 빠져 간신히 옥수수밥 잡수시던 늙으신 어머니와 좋아지지 않는 세간 살이 하며 병 든 누이 돌보느라 세대주 대접 한번 제대로 못 받아 보고 부대끼던 동생, 옥수수밥 앞에 놓고 고모 앞에 놓인 이밥 그릇만 뚫어져라 건네다 보던 어린 두 조카들, 가냘픈 몸매에 병든 시누이 시중까지 들라 웃음 한번 제대로 찾아보기 힘들던 올케의 모습...

숟가락에 담아 입에 떠 넣는 것이 밥 같지가 않아 돌을 씹는 것 같고 목구멍으로 넘어 가는 음식은 깔깔한 모래알 같아 끼니마다 수저를 들지 못하는 내 모습이 민망해 올케는 어린 조카들을 윽박질러 밖으로 내어쫒기도 했었다.

병 치료는 끝났으나 식구들에게 짐 되는 것이 미안해 혼자 밥벌이라도 해보려고 애쓰다 재발된 병세로 죽을 고비를 넘기고 몸이 완쾌되기 시작될 무렵, 나 때문에 지칠 대로 지친 어머니는 큰 언니의 집으로 떠나갔고 출근하는 동생과 아직 몸이 추서지 못한 내게 어린 조카들을 맡겨두고 본가에 다녀온다며 떠난 올케는 한 달이 되어 오도록 소식조차 없고, 속이 타 술 한잔 마시며 ‘두 번이나 살려줬으니 인젠 누이 혼자 알아서 살아가라’고 사정하듯 말하던 동생의 목소리..

2. "무섭다니, 다버리고 가는 사람이 뭐가 무서운가?"

병 치료는 끝났으나 식구들에게 짐 되는 것이 미안해 혼자 밥벌이라도 해보려고 애쓰다 재발된 병세로 죽을 고비를 넘기고 몸이 완쾌되기 시작될 무렵, 나 때문에 지칠 대로 지친 어머니는 큰 언니의 집으로 떠나갔고 출근하는 동생과 아직 몸이 추서지 못한 내게 어린 조카들을 맡겨두고 본가에 다녀온다며 떠난 올케는 한 달이 되어 오도록 소식조차 없고, 속이 타 술 한잔 마시며 ‘두 번이나 살려줬으니 인젠 누이 혼자 알아서 살아가라’고 사정하듯 말하던 동생의 목소리..

내가 힘든 만큼 그들도 힘들었으리라. 내가 아픈 만큼 그들도 아팠으리라. 그래도 병든 나는 그들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을 어찌하랴. 내가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단 한 가지, 그들의 곁을 떠나주는 것이었다.

그 몸으로 괜찮겠냐고 걱정하는 동생에게 하직 인사 나누고 길을 떠났으나 갈 곳 없어 이 곳 저 곳 헤맨 끝에 마침내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두만강 가에 섰을 때의 내 모습은 틀림없이 허울만 남은 ‘산송장’의 모습이었으리라.

그 곳에서 소중한 것들을 모두 버렸었다. 버리면 안 될 것을 알면서도, 그대로 안고 가면 무거운 짐이 되어 두만강으로 들어서는 나의 두 발목을 잡을까 두려워 그 순간만은 버렸다.

‘내게는 아무도 없어. 부모도 형제도 친척, 친우도 없어. 세상천지 아무도 없는 나야. 그래, 나는 기댈 곳도 의지할 곳도 아무것도 없어서, 고아여서, 홀몸이어서 가는 거야...’ 두만강의 저편에서 이편으로 넘어서던, 내 인생을 완전히 바꾼 그 2분간 나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되뇌었던 것은 오직 이 말 뿐이었다.

함께 손잡고 두만강 물에 들어선 19살내기 연이가 무섭다고 훌쩍인다. 무섭다니, 뭐가 무서운데, 다 버리고 가는 이가 무서울 것이 뭐가 있는데...

"너 이만한 것도 생각하지 못하고 왔어? 울지 마." 독이 밴 나의 조용한 목소리에 연이가 울음을 그쳤다. 그랬다. 아무 미련도 두려움도 없었다.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그 순간만큼은 소중한 내 목숨도 생각지 않았다.

그렇게 넘어왔다. 내 고향의 끝인 두만강을... 다 버리고 텅 빈 가슴엔 ‘죽지 않고 살아야 한다’는 한마디만 달랑 품은 채...꽉 꽉 채워진 얼음에 간신히 남아 있는 그 한마디가 강가에 선 내게는 인생의 목표였다.

한번 묻어버린 소중한 추억을 다시 꺼낼 기회는 북송의 위험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던 중국 땅에서는 단 한 번도 오지 않았다. 열심히 일하고 싶어도 일할 곳 없고 어딜 가나 탈북자에게 보내지는 불신과 위험의 눈총에 견디기 어려웠던 나날들...

더러운 수욕을 채우려다 말을 듣지 않으면 고발하겠다고 위협하던 사람들을 피하며 조선족이라 속이고 간신히 취직한 회사생활, 열심히 일해서 사장할머니의 사랑을 독차지한 내가 아니꼬워 북한여자라고 저희들끼리 수군대며 공안에 고발하라 추겨대던 조선족들, 그래도 나는 어찌 할 수 없어 그냥 혼자 화장실에서 얼굴이 퉁퉁 붓게 울었다.

갈 곳이 없는 것을 어찌하랴. 내가 이제 어디로 더 갈 것인지, 더는 피하고 싶지 않고 도망치고 싶지도 않았다. 이 구차한 목숨 부질없이 유지하려 발버둥치지 말고 그냥 이 곳에서 끝을 내고 말자. 그러나 하늘이 보기에도 나의 운명이 너무 가혹해 보였는지 생각지도 않게 목사분이 오셔서 사람 잡이에 미친 그들의 마음을 진정시켜 주었다. 영문 모르는 목사님의 두 손을 꼭 잡고 “와주셔서 감사하다”고 끊임없이 속삭이는 내 두볼로는 하염없는 눈물만 흘렀다.

그것이 중국에서 나의 생활이었다. 절망 끝에 한국으로 갈 수 있다는 친구의 소개를 듣고 1박 2일을 기차에 몸을 싣고 천방지축 찾아갔으나 그 곳서 나를 기다린 것은 또 다른 북송의 위험과 끝이 보이지 않는 기다림이었다.

살점이라도 떼줄 듯이 살뜰하던 사람이 자신의 수욕을 채울 수 없게 되자 공안에 고발하겠다고 위협하던 순간에 참고 참았던 분노와 원한이 터져 그 자리를 뛰쳐 나왔으나 갈 곳은 없었다.

지켜주는 나라도 없고 죽어도 돌아볼 이 없는 내가 거리를 헤매다 폭풍이 울부짖는 바닷가에서 세찬 파도를 바라보며 생각했던 것은 저 속엔 과연 내가 있을 자리가 있을까, 이렇게 살려고 죽음의 고비를 넘기며 예까지 오진 않았다는 것이었다.

두만강가에 묻어버린 지나온 나의 삶, 비록 아프고 힘든 추억들도 많았지만 그래도 그것들은 언젠가는 다시 꺼내어 내 마음속에 품어야 할 소중한 것들이었다.

3. 대한민국에 오기 위해 목숨을 걸었다

지켜주는 나라도 없고 죽어도 돌아볼 이 없는 내가 거리를 헤매다 폭풍이 울부짖는 바닷가에서 세찬 파도를 바라보며 생각했던 것은 저 속엔 과연 내가 있을 자리가 있을까, 이렇게 살려고 죽음의 고비를 넘기며 예(중국)까지 오진 않았다는 것이었다.

두만강가에 묻어버린 지나온 나의 삶, 비록 아프고 힘든 추억들도 많았지만 그래도 그것들은 언젠가는 다시 꺼내어 내 마음속에 품어야 할 소중한 것들이었다.

철없던 시절 내가 부모님의 품에서 아무 걱정 없었던 것처럼 그렇게 행복한 날들이 다시 오게 되면 제일 먼저 묻어둔 나의 엣 추억들을 조금씩 꺼내 보려 했지만 과연 그런 날이 올 수 있을지 막막하기만 했었다.

또다시 1년 반이라는 피 말리는 기다림, 그리고 마침내 이(한국) 땅에 왔다. 다시 한번 목숨을 걸고 중국에서 삼국으로의 탈출이라는 극적인 인생의 포물선을 새로이 그리며 대한민국으로 왔고 여기서 나는 지금 행복한 삶을 누리고 있다. 고통스러웠던 그 모든 추억을 뒤로 한 채.

가까이 있어도 멀었던 이 곳, 분명히 하나인 우리 땅이지만 60년의 분단이 안겨준 이질감으로 힘들고 어려운 순간도 많다. 그래도 나는 이 땅에서 내 인생에 가장 즐겁고 행복한 시절을 보낸다.

대한민국에 온 내게 처음으로 새 생활에 대한 희망과 소중한 꿈을 품게 해주었던 하나원과 살뜰했던 선생님들은 오랫동안 슬픔과 고통의 미궁 속에서 헤매던 나의 넋을 안정시켜 주었다.

하나원을 수료하고 나온 내게 아담하고 자그마한, 내 인생에 처음으로 내 이름 석자로 차례진 임대주택은 새로운 내 삶의 소중한 보금자리로 자리 잡게 되었다.

가끔 힘들 때마다 나는 그 날의 두만강가를 떠올린다. 암흑과 광명의 가운데 서서 뒤돌아보며 버릴 수밖에 없었던 내 삶의 슬픈 추억들과 오늘을 위해 맞바꾸려 했던 귀중한 내 목숨, 그리고 목숨을 건 대가로 얻어진 오늘의 소중한 자유와 행복을 생각해 본다.

그러면서 ‘요만한 게 무슨 고생인데, 이 대한민국에 오려고 목숨도 걸었었는데 이건 아무것도 아니지, 오늘의 내 삶이 얼마나 행복한데...’라고 나 스스로에게 말한다. 그렇게 비우고 또 비워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 새 삶을 만들어 가며 마음속에 아름답고 즐거운 추억거리를 하나씩 하나씩 채워간다.

처음 먹어보는 생문어회를 보고 질겁해 비명을 질러 주변 분들이 깜짝 놀라던 일, 지하철을 잘못 타 30분이면 갈 곳을 2시간이나 돌고 돌던 일, 집을 배정받은 첫 날 밖에 나갔다가 꼭 같이 생긴 아파트들을 보고 집을 찾을 수 없어 몇 시간을 헤맨 끝에 간신히 찾은 내 집 현관 앞에서 혼자 배를 잡고 웃던 일..

몸도 약한 내가 한국에서의 어려운 생활을 이겨낼 수 있을지 스스로 걱정일 때 내게도 면접이라는 행운이 차려졌고 부족한 나와 함께 일하자며 선뜻 손 내밀어주던 사람들, 아무 것도 모르는 내게 차근차근 가르쳐 주며 오늘의 내가 있게 해준 직장의 동료들, 익숙되지 않은 한국 생활의 부적응으로 몸살을 앓아누운 내게 다정히 대해주던 고마운 사람들...

그리고 지금은 두만강 가에서 소중하면서도 버릴 수밖에 없었던 그 모든 것들을 파내어 내 마음속 깊은 곳에 담아 소중히 담아 안고 남북이 하나 될 통일의 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살고 있다. 그 날이 오면 내 고향의 그리웠던 이들에게 나의 마음속에 가득 채워진 대한민국에서의 아름다운 삶의 갈피들을 모두 퍼내 보여주려고...

"난 대한민국에 와서 행복하다" 2010/07/30 15:10 추천 7 스크랩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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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log.chosun.com/nkch/4872012

[탈북자 수기]



나는 여섯 살에 아버지를 잃었다. 아버지는 평범한 탄광노동자였다. 내가 북한에서 제일 행복했던 때는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였다. 나는 3남매 중 외딸이었다. 오빠와 남동생이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우리 집 식구들은 굶주림에 허덕이며 사람이 아닌 짐승 같은 삶을 살아야 했다.

아버지가 묻히신 후 어머니는 탄광에서 일했다. 나는 아홉 살부터 어머니를 따라 오빠와 함께 탄광에서 일했다. 오소리굴 같은 갱으로 기어들어가 탄을 광주리에 담아가지고 나와서는 그것을 팔아 생계를 유지했다. 어떤 때는 도적질을 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잡혀서는 매를 맞고.

나는 매일 배고픔을 안고 살아야 했다. 어떤 때는 너무 힘들고 배고파 탄광 갱에서 단잠에 빠져있던 중 굴 천정에서 버럭(버력. 광석이나 석탄을 캘 때 나오는 광물성분이 섞이지 않은 잡돌)덩어리가 떨어져 맞아죽을뻔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더욱 견디기 어려운 것은 어머니와 오빠의 구박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무서운 굶주림과 생존위협에 시달리면서 우리 집에는 사랑과 가족애가 깡그리 사라져버렸다.

악만 남은 어머니는 걸핏하면 화를 내며 자식들을 때리곤 했다. 어머니가 악에 받쳐 욕설을 퍼부으며 자식들을 때릴 때 보면 무서웠다. 어느 때부터인가 나는 어머니가 나의 친어머니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지금도 어머니 생각을 하면 아마 친어머니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그만큼 나는 어머니로부터 지독한 구박을 받으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오빠도 그랬다. 수시로 나를 때리고 구박하곤 했다. 너무 배가 고파 찬장에 손을 가져가면 손목을 밟아놓고 탄을 팔아 강냉이를 사오면 제가 모두 먹어버리고. 그리고 한마디라도 대꾸질을 하면 사정없이 때렸다. 나는 온몸에 퍼런 멍이 지워질 날이 없었다.

그래도 나를 생각해주는 것은 동생이었다. 어린 그는 오빠가 나를 때리면 울면서 누나를 때리지 말라고 형에게 매달리곤 했다. 나는 열세 살이 되던 해 어느 날 부엌에서 오빠에게 맞아 발목이 부러졌다. 한 달 동안 집에 누워있었는데 그 때는 정말 굶어죽는 줄 알았다. 나는 마침내 밥을 실컷 먹을 수 있다는 중국으로 도망칠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는 그 말을 동생에게만 했다. 아홉 살이었던 동생은 울면서 가지 말라고 하더니 다음날 어딘가에서 신발을 하나 훔쳐가지고 와서 나에게 주었다. 나는 그때까지 신발을 신지 못하고 다녔다. 나는 동생이 준 그 신발을 신고 중국으로 도망쳤다. 지금도 울면서 누나를 바래다주던 어린 동생의 모습이 삼삼히 떠오른다.

중국에서 걸인과도 같은 삶을 살던 나는 열여섯 살에 인신매매조직에 걸려 심양 근처의 한족마을로 팔려갔다. 거기에서 4년을 살았다. 나는 부지런히 일하면 사람 취급이라도 해주겠지 하는 생각에 열심히 살았다. 눈비 오는 날을 빼고는 계속 밭에 나가 일했다. 그러나 남편이라는 사람은 나를 사람 축에도 넣지 않았다. 자기는 마작판에나 놀러 다니면서 걸핏하면 나를 구박하고 때렸다.

그가 나를 때리고 구박하는 이유는 단 한가지였다. 내가 ‘못사는 북한에서 온 거지’라는 이유였다. 나라 없는 백성은 상가집 개만도 못하다더니 내가 바로 그 상가집 개였다. 남편이라는 사람조차 그렇게 나를 때리고 구박하니 옆집과 동네에 사는 사람들도 나를 사람같이 여기지 않았다.

어느 날 나는 옆집 사람에게 몇 마디 대꾸를 했다가 죽도록 맞았다. 너무 화가 나서 남편에게 말했더니 남편은 거꾸로 나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그래서 다음날 나는 그 집을 도망쳤다. 그 후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며 식당일을 하다가 심양에서 고마운 사람을 만나 한국으로 오게 되었다.

2008년 한국에 올 때 까지만 해도 나는 나에게 그렇게까지 큰 행복이 기다리고 있을 줄은 몰랐다. 한국정부에서는 하나원을 수료하고 나오는 나에게 집을 주고 돈도 줬다. 대한민국은 자그마한 불편이라도 있을세라 우리를 보살펴주었다. 나는 지금도 잊지 않고 있다. 하나원을 나온 후 언젠가 몸이 조금 불편해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었는데 동네 교회에 계시는 분들은 매일같이 나를 찾아와 위로해주고 불편한 것은 없는지 일일이 물어보고 보살펴주곤 했다.

정말로 대한민국은 사랑이 넘쳐나는 곳이었다. 난생 처음 그런 환대를 받으며 나는 눈물도 많이 흘렸다. 너무도 고생스러웠던 지난날을 돌아보며 울었고 대한민국이 고마워 울었다.

북한에서는 ‘어머니당’이라는 말을 많이 한다. 그 말은 어머니도 주지 못하는 사랑을 노동당이 주니 당은 어머니보다 더 위대한 존재라는 뜻이다. 그러나 지금 나는 이런 말을 하고 싶다. 어머니보다 더 위대한 것이 대한민국, 대한민국은 진정한 나의 조국이라고. 비록 스무 살이 넘는 나이에 글을 배우는 처지이지만 나는 지금 행복하다. 그래서 이런 글을 자주 써본다. ‘대한민국’ 그리고 ‘감사합니다’라는 글을.

탈북자 박경옥 /자유북한방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