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7월 27일 화요일

[한형동의 중국世說] 중국의 천안함 사태 관여와 우리의 대북정책 [JOINS_디지털뉴스센터]

[한형동의 중국世說] 중국의 천안함 사태 관여와 우리의 대북정책 [JOINS_디지털뉴스센터]

입력시각 : 2010-07-26 오전 10:33:24

“외교는 차선의 예술이다”라는 외교가의 명언이 있다. 평화를 먹고 살아야 하는 외교의 태생적 모호성과 한계성을 잘 표현한 말이다.

이번 천안함 사태에 관한“유엔 의장성명”은 천안함에 대한 공격주체도 없고, 누가 책임져야 한다는 말도 없다. 다만 “천암함은 공격받았고, 이는 규탄스런 행위다” 라는 것이 내용의 전부다. 세계 최고의 문명국 대표자들이 모여 도출한 외교문건으로 보기에는 너무도 어처구니 없는 어불성설의 괴변이다. 게다가 과학적 근거가 분명한 진실을 외면하고, 파렴치한 자기 우방 편들기나 하는 소인배들이 강대국이랍시고 국제무대에서 부린 추태는 꼴불견의 극치였다.이 모두 유엔 무용론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를 새삼 증명하기에 충분한 연출이었다.

이 결과를 놓고 한-미 양국이 “중국과 러시아도 동참한 유엔의 의장성명을 도출해낸 자체가 큰 의미가 있다”며, 애써 부끄러운 성적표를 비호하는 모습은 가련하기까지 하다. 북한은 이를 두고 외교적 승리라고 천명했다. 사실상 이번 외교전은 연금술의 마술사인 중국과 북한의 승리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우리가 굳이 위로를 삼는 다면 외교무대에서 중국은 우리에게 어떤 존재인지 그 정체를 분명히 확인할 수 있었던 점일 게다.

이럴 바에는 중-러에 구차한 협력요구를 하지 말고, 합동조사 발표 직후 바로 서해 군사훈련과 심리전 방송을 실시하고, 대북 금융제재에 착수하는 것이 보다 실효적인 대응이었다. 중-러의 의중도 간파하지 못한 채 유엔 외교로 가져간 것이 오히려 한-중 관계의 불신지수만 높이고, 한반도를 둘러싼 신 냉전체제나 태동시킨 결과로 나타난 것이다.

한-미 양국은 7월 25일부터 동해에서 나흘간 실시되는 대규모 합동군사 훈련에 돌입했다. 이번 훈련에는 미 항모 ‘조지 워싱턴’ 호 등 약 20척의 군함, 미국의 최신예 스텔스 전투기 F-22기 등 항공기 200기와 병력 8천명이 참가한다. 물론 이 군사훈련의 목적은 천안함 만행을 저지른 북한에 대한 강력한 경고의 메시지다.

중국 정부는 미 항모가 참가하는 서해안 훈련에 강력히 반발했다. 중국의 국방대 전략敎硏部 주임 朱成虎는 “ 한-미 군사훈련은 미국의 對중국 현시적 무력시위(炫耀武力)”라고 평했다. 홍콩의 명보는 “한-미 군사훈련 목적은 대북 시위이지만 다른 면에서는 중국을 의식한 ‘신 냉전’시대의 전형적 군사위협” 이라고 전문가들의 말을 인용, 보도했다. 일본 요미우리는 사설에서 “한-미 군사훈련이 대북 억지력을 발휘해 줄 것을 기대한다”고 보도했다. 신 냉전 시대가 성큼 다가오는 듯한 표현들이다.

미국의 차기 국가정보국장으로 내정된 ‘제임스 클래퍼’는 최근 상원 공청회에서 “북한은 정치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다시 한국을 공격할 위험한 시기에 접어들었다”고 보고했다. 참으로 기막힌 현실이다. 그간 북한에 22조원이나 도와주고 얻은 결실이 바로 이것이란 말인가? 이는 우리가 북한에 퍼주기만 하다 잘못 길들어진 북한의 대 한국 경시태도에 기인한 결과다.

이런 냉엄한 현실 앞에 우리는 실현성도 없는 현학적인 언어의 유희나 이상에 치우친 대북정책 은 불필요하다. 무엇 한 가지라도 실질적이고 효과적인 대안을 내놓고 추진해야 한다. 특히 북한의 사기극 무대로 전락한 6자 회담 따위는 기대할 것도 없다. 차라리 6자 회담보다는 미-중간 전략대화 강화나 한-미-중-러 4국간 전략대화 시도 등 새로운 기재(Mechanism)를 통해 북핵을 저지하는 대안이 필요한 시점이다. 그렇다고 남북대화의 퇴로까지 차단하자는 것은 아니다. 북한이 국제적 압력이나 경제파탄의 심화로 갈증을 느껴 대화를 원할 때, 그들의 진정성을 확보해가면서 남북대화를 주도해 나가야 한다. 현 상황에서 성급한 마음으로 남북대화를 서두를 필요는 없다.

북핵문제의 가장 현실적인 대안은 당장 말이 안 통하는 북한을 설득하기 보다는 한-미 전략대화를 심화시켜, 우리도 잠재적 핵개발 능력을 조속히 강화하는 것이다. 동시에 북한의 핵개발을 기정사실로 수용, 북핵시설에 대한 정밀타격 능력을 배가하는 등 남북간 비대칭 군사력 분야의 대책을 서둘러야 한다. 나아가 미국 등 국제사회로 하여금 북한이 WMD(대량살상무기)를 해외에 반출치 못하도록 유도해야 한다.

이러한 현실적 방안 추진과 함께 중-장기적으로는 중국과 새로운 차원의 전략대화 채널을 구축하는 방안도 필요하다. 이 방안으로서 우리 여당이 중국 최고의 권부인 공산당과 당대당의 새로운 접근 방식을 시도하는 것도 고려해 볼만 하다. 또한 중국 내에는 북한의 비핵화와 함께 “중-북 관계를 혈맹이 아닌 정상국간 관계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진보적 외교관료와 학자들이 있다. 이들과도 긴밀한 대화채널을 구축하여,“한국에 의한 통일이 중국 국익에도 부합될 수 있다”는 인식의 전환을 갖도록 유도하는 것도 긴요하다. 한편, 지금은 잊혀진 계절로 돌려놓은 러시아도 여전히 한반도에 대한 전략적 가치를 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북-러 관계 및 한-러 관계를 보다 심층적으로 검토, 러시아를 대북 전략에 활용하는 방안도 찾아야 할 것이다.

일찍이 ‘조지 워싱턴’은 “전쟁에 대비하는 것이 평화를 지키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라고 역설했다. 아무런 희생과 부담도 없이 국가안보를 지키겠다는 것은 전쟁과 평화의 개념도 모르는 철부지의 꿈일 뿐이다. 부디 “불굴의 의지로”로 명명된 이번 한-미 합동군사 훈련이 중국의 반발과 북한의 단말마적인 협박에 추호의 흔들림 없는 의지로 대한민국의 자존을 지키고, 북한측에 도발의 대가가 무엇인지 확실한 경고등 역할을 해주기 바란다.

한형동 산둥성 칭다오대학 객좌교수
※중앙일보 중국연구소가 보내드리는 뉴스레터 '차이나 인사이트'가 외부 필진을 보강했습니다. 중국과 관련된 칼럼을 차이나 인사이트에 싣고 싶으신 분들은 이메일(jci@joongang.co.kr)이나 중국포털 Go! China의 '백가쟁명 코너(클릭)를 통해 글을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2010년 7월 26일 월요일

아파트 신화 그것은 '거대한 덫'이었을까요?

아파트 신화
그것은 '거대한 덫'이었을까요?


    이 책이 무척 반가웠습니다. 드물게 만나는 ‘탐사 저널리즘’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하우스 푸어』의 저자는 경제 전문가나 부동산 전문가가 아닌, 방송 PD입니다. 저자가 관심을 가진 것은 경제 지표나 시세가 아니라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저자는 부동산 문제를 다룬 프로그램을 준비하면서 판교와 강남 재건축, 인천 송도, 김포, 용인, 분당, 일산 등 아파트 세대들의 실상을 조사합니다. 조사 방법은 단순합니다. 각 세대의 실상을 들여다보는 것이죠. 이 ‘무식한’ 조사를 통해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됩니다.
    가령 '강남'의 한 아파트 4000세대의 경우 세대 대부분은 떨어지는 집값과 대출금, 이자 등에 허덕이고 있었습니다. '비싼 아파트'에 살지만 '생활은 어려운', 말 그래도 '하우스 푸어(House Poor)! '인 셈이지요. 문제는 하우스 푸어의 숫자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지금이라도 우리의 지난 10년을 돌아봐야 한다고 지적합니다. 우리가 아파트 신화라는 거대한 이야기의 덫에 걸려있던 건 아닌지, 지금도 이 덫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닌지 말입니다.

2010년 7월 25일 일요일

노후는 내힘으로 쿨~한 슈퍼실버가 뜬다, 손자 안봐! 상속 안해!

노후는 내힘으로 쿨~한 슈퍼실버가 뜬다
손자 안봐! 상속 안해!
서울 강남의 40평대 아파트에 사는 회사원 A씨는 친구들이 농담 삼아 던지는 "넌 부자잖아" 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좋지 않다. 얼마 전 어머니가 역(逆)모기지론(주택을 담보로 매달 연금처럼 노후 생활비를 받는 제도)을 신청하며 자식에게 생활비를 받지 않고 집도 물려주지 않겠다고 공언했기 때문이다. A씨의 부모님은 이 아파트 외에는 특별한 자산이 없다. 9억원 감정가를 아슬아슬하게 하회해 역모기지론을 신청한 A씨의 부모가 한 달에 손에 쥐는 돈은 450만원 내외. 적지 않은 이 돈으로 A씨 부모는 은퇴 이후에도 골프를 치고 고급차를 타는 등 퇴직 전 수준의 생활을 유지하며 살아간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로 묘사되던 한국사회 부모의 모습이 달라지고 있다.

젊은 나이엔 자녀를 위해 모든 걸 바치고 늙어서는 자식에게 의지하는 인생 패턴은 이젠 옛말이다. 부동산 개발붐과 고도 경제 성장기에 직장을 다닌 이들은 가장 부유한 세대 중 하나다. 자식이 부모를 `모시고 산다`는 말은 이제 더 이상 어울리지 않게 됐다. 고령화사회로 진입하는 과정에서 경제력을 갖추고 자식과 손자에 얽매이지 않으며 취미생활과 자기계발에 몰두하는 이른바 `슈퍼실버세대`가 등장한 것이다.

이정재 서울대 농생대 교수 자료에 따르면 65세 이상 고령자의 소득에서 자가 소득이 차지하는 비중이 2009년 41.3%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1980년의 22.4%와 비교하면 거의 2배 가까이 늘어난 셈이다. 반면 자식이 보전해주는 돈은 1980년 75.6%에서 2009년 30.5%로 줄었다. 젊을 때 들어뒀던 국민연금 등 공적 부양은 28.1%로 증가했다. 결국 자기 소비의 69.4%가 모두 본인이 벌어둔 돈으로 살고 있단 뜻이다.

자식에게 경제적으로 독립한 노년층은 삶의 질에 큰 가치를 두는 모습을 보인다. 손자 보느라 집에 얽매이기 싫다며 양육 거부를 선언하는 노인들도 최근 크게 늘었다.

서울 마포구 한 직업소개소 전화상담자는 "직장인들 사이에서 보모를 찾는 문의가 매일 몇 건씩 들어오고 있는데 최근 들어 늘어나는 추세"라고 밝혔다. 맞벌이는 느는데 애 봐줄 노년층은 줄고 있다.

이들은 예전 세대만큼 상속에 목을 매지도 않는다. 박홍규 동양종금증권 금융센터 양재지점장은 "예전에는 부모님이 아껴가면서 물려주려는 경향이 많았는데 지금은 60대 이후에도 기대 수명이 높기 때문에 상속이나 증여를 절실하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자신을 위해 기꺼이 지갑을 여는 이들을 위한 산업도 호황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노인 요양ㆍ복지시설 운영업 매출은 2008년 1조358억원을 기록했다. 전년 대비 88%가량 늘어난 것이다.

서울 종로구 무악동 세란병원도 최근 노인 의료비 지출이 늘면서 환자 수가 급증하고 있다. 이 병원 관계자는 "병원 환자 수가 매년 10%씩 늘고 있는데 평균 방문 환자 수 800명 가운데 50대 이상이 70%를 넘는다"고 말했다.

2008년 `메디컬 노인복지주택`을 표방하고 들어선 이 병원은 간호사와 응급구조사가 24시간 상주하며 노인들의 건강을 돌봐주고, 중앙 모니터실을 통해 입주자들의 동선까지 실시간으로 파악한다. 노인들은 수영이나 골프, 게이트볼 등의 운동을 즐길 수 있다.

대학도 이 같은 변화에 발 빠르게 대응하고 있다.

몇몇 대학은 `스포츠 건강학부` 혹은 이와 유사한 전공학부를 신설해 노년층의 건강을 효과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전문인력 양성에 팔을 걷었다.

시니어ㆍ실버 스포츠 전문 지도자가 많이 필요해질 것이 확실한 만큼 노인 건강관리 전문가를 조기에 육성하려는 것이다.

부동산개발 세대답게 이들의 재산은 부동산에 집중돼 있는 사례가 많은데, 이들은 역모기지론을 활용해 예전 수준의 생활을 유지한다.

주택금융공사 자료에 따르면 2007년 역모기지론 신청건수는 500명 수준에서 지난해 1124명으로 늘었고 올해엔 7월까지만 벌써 906명이 신청했다.

◆ 겉은 화려해도 외로움 호소

= 멋진 노년을 보내는 듯 보이는 이들의 삶이 항상 행복한 것만은 아니다. 이면엔 그림자도 짙다.

자녀ㆍ손자들과 오순도순 살아가던 전통적인 가족제도가 붕괴되고 자식들과 부대끼며 사는 경우가 줄다보니 우울증이나 외로움을 호소하는 노년층이 늘고 있다.

한국자살예방협회 2009년 조사 결과에 따르면 대한민국의 자살하는 노인 숫자는 2008년 4029명으로 매년 10%씩 늘어나고 있는 것으로 집계됐다.

전체 자살자 3명 중 1명이 노인인 셈이다. 주변 사람들의 불행한 노후를 본 노인들의 삶의 모습도 `자식 중심`에서 `본인 중심`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

역모기지론을 하더라도 이들의 마음이 편한 것만은 아니다. 송파구에 거주하는 60대 초반의 김 모씨는 "솔직히 말해 예쁜 자식들한테 왜 집 한 채라도 물려주고 싶지 않겠냐"며 "하지만 가진 재산이 집 한 채인데 자식들한테 손 안 벌리고 살려면 이 방법밖에 없다"고 털어놨다.

◆ 생산과정 참여 필요

= 전문가들은 고령층을 소비의 주체로만 인식하기보다 이들이 제대로 된 만족을 느낄 수 있도록 생산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을 만들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평균 수명이 늘고 있는데 예전의 퇴직제도론 더 이상 경제가 활기를 띠기도 어렵다. 무엇보다 있는 돈만을 가지고 쓰다 가야만 하는 노인이라면 절대 행복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정재 서울대 교수는 "적극적인 재교육을 통해 이들을 `생산의 주체`로 이끌어야 한다"며 "고령자 고용은 조세 수입을 확대하고 연금 재정 압박을 완화시키며 젊은 세대의 부담을 감소시켜 일석삼조"라고 말했다. 그는 "노인 스스로 자신이 `일을 통해 보람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부수적인 효과도 얻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아직까지 대부분의 기업은 노인을 위한 일자리 마련에 소극적인 것이 사실이다.

고령자 가운데 대졸 이상 고급 인력 비중은 2000년 10.6%에서 2025년 38.7%로 늘어날 것으로 전망되지만 현재 대부분의 노인들은 무차별적으로 단순 노무직에 종사하고 있다.

직장에서 고위직에 있었지만 퇴직하면 일을 하고 싶어도 개인 사업 외엔 마땅히 할 게 없다. 고령 인력 고용을 위한 사회적 장치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중국의 대북전략" 반성해야만 한다. 중국, 냉전 이데올로기 여전!

얼마전 인터넷으로 본 한국 드라마 선덕여왕은 내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민족 독립과 국가 통일이라는 한국인의 간절한 염원을 볼 수 있었던 좋은 작품이었다.  


중국의 근현대사도 강대국의 침략과 식민 지배를 받았던 시기가 있었다. 하지만 역사를 돌이켜 보면 사실 중국은 '종주국'이라는 미명 하에 자신 보다 작은 조선의 내정을 간섭하기 일쑤였다. 특히 청나라 말기, 위안스카이(袁世凯)는 총리교섭통상대신으로 조선에 부임해 왕실까지 간섭하였는데, 이는 본질적으로 일본인들의 만행과 다를 것이 없었다.


약소국이 당한 치욕과 설움을 생각한다면 중국은 반드시 이에 대해 반성해야 할 필요가 있다. 중국은 이제 강대국이 되었다. 자신보다 약한 나라를 대할 때 과연 자국의 이익만을 최우선시 해야 할지, 아니면 상호 대등한 위치에서 도움을 주어야 할 지 결정해야 한다.


중국에“남과 입장을 바꾸어 헤아린다”(將心比心)라는 말이 있다. 만약 대만이 공해 상에서 중국의 군함을 격침시켜 수 많은 인명을 앗아갔더라도 중국은 '냉정함과 자제심'을 요구할 수 있을 것인가? 한국이 북한에 대해 군사보복을 취하려는 것을 두고 많은 중국인은 '골육상잔'을 하려한다고 비난하는데, 이같은 논리라면 북한이 남한의 군함을 공격하여 많은 사상자를 낸 것은 어찌하여 비난하지 않는가.  


중국, 냉전 이데올로기 여전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면서 중국은 이념적 이유로 북한 편에 섰다. 냉전이 끝난 오늘날, 혹자는 한국이 냉전 이데올로기를 버리고 미국 편에만 치우치는 것을 그만 둬야 한다고 한다. 하지만 냉전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중국은 게다가 한국과 파트너십을 맺었음에도) 중국이 여전히 냉전 시기 '혈맹'인 북한을 감싸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사실 중국에게 있어 냉전 이데올로기는 사라진 적이 없다. 민족주의 정서가 확산되면서 냉전 이데올로기가 단지 '서구의 음모론'이란 이름으로 옷을 갈아입은 것 뿐이다.


천안함 사건을 계기로 중국이 북한에 대한 태도를 전향하지 못 한 것은 전략적인 실수가 아닐 수 없다. 지금은 중국이 북한을 옆에 끼고 미국과 딜을 하며 일시적으로 미국에 위협도 가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이 '약발'도 떨어질 것이다. 북한을 껴안고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더 많은 문제에 봉착하게 될 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기 때문이다. 장기적으로 이런 전략은 전혀 득 될 것이 없다는 것을 중국인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중국은 언젠가는 북한이라는 이 무거운 짐을 내던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나는 평범한 중국인이지만 '대중화사상'은 가지고 있지 않다. 한반도가 어떠한 상황에서도 미국과 중국, 러시아와 일본을 포함하여 어떠한 강대국의 세력에도 좌지우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상하이 독자 chorlauheung / 정리=중문뉴스팀 허지은

2010년 7월 23일 금요일

강남 아파트 한 채 가진 대기업 간부도 하류층?연합뉴스 기사100자평(0)입력 : 2010.07.23 07:36

강남 아파트 한 채 가진 대기업 간부도 하류층?

자녀 사교육비와 대출이자 내고 나면 ’적자 인생’
부동산값 대세 하락국면 시작되면 중산층서 탈락

우리나라에서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대기업의 부장으로 재직 중인 김모(45)씨는 사내에서 부러움의 대상이다.

왜냐하면, 아파트 값이 떨어지지 않아 ’불패 신화’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서울 강남에 한 때 호가가 9억원까지 올랐던 35평짜리 아파트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김 부장은 그러나 직장 동료들이 자신을 상류층이라고 치켜세워줄 때 겉으로는 가볍게 웃고 말지만 속으로는 피눈물이 쏟아질 지경이다.

사실은 4년 전 은행에서 3억원의 대출을 받아 아파트를 장만한 이후 빚이 갈수록 늘어나 집 가진 하류층으로 전락할 위기를 맞고 있다.



◇ 불어나는 사교육비 잦아지는 부부싸움

은행에 매달 내야 하는 대출이자도 이자지만 김 부장이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것은 중학생과 초등학생 아이들에게 매달 270만원 가까이 들어가는 사교육비다.

“애 하나 서울에 있는 좋은 대학에 보내기 위해 필요한 것 네 가지는 할아버지의 재력, 아빠의 무관심, 엄마의 정보력, 그리고 동생의 희생”

전국에서 장바구니 물가가 가장 비싸기로 유명한 서울 강남의 아줌마들 사이에서 요즘 유행하는 말이다.

아빠가 벌어들이는 수입으로는 사교육비를 충당하지 못하니 할아버지의 경제적 지원이 필요하며 옛날 얘기하는 아빠는 자녀 교육에 걸림돌만 된다는 뜻이다.

또 애 두 명을 모두 대학에 보내기에는 돈이 너무 많이 드니 동생은 일찌감치 포기해야 첫째를 좋은 대학에 보낼 수 있다는 뜻도 내포하고 있다.

김 부장이 “우리 처지에 과외비를 너무 많이 쓰는 것 아니냐”며 화를 낼 때마다 부인은 “자식 교육에 대해 알지도 못하면서 간섭하지 말라”고 맞받아친다.

강남의 상류층 집안 학생들은 국어, 영어, 수학, 과학 등 과목당 2명의 과외교사들이 집으로 찾아오며 과외교사 1명당 월평균 60만∼70만원을 받는다고 한다.

일부 부유층의 경우 과목당 적게는 100만원, 많으면 몇 백만원짜리 과외를 받는 학생들도 있다고 한다.

그나마 학원은 싼 편이다.

유명 학원들이 몰려 있는 강남구 대치동의 학원비는 초등학생의 경우 과목당 평균 25만원, 중학생 30만원, 고등학생은 40만원이다.

과외를 받지 않고도 이른바 SKY(서울대 고려대 연세대)를 졸업하고 대기업에 취직한 김 부장 입장에서 더욱 화가 나는 것은 그렇게 사교육비를 많이 들여도 자식들의 명문대학 진학이 보장되지 않으며 명문대학을 나와도 취업이 쉽지 않다는 점이다.

김 부장은 “사교육비의 부담이 너무 커 한국을 떠나 이민을 떠나고 싶다는 생각도 든다”면서 “동료들과 회식을 하게 되면 정부나 정치인들을 원망할 때가 많다”고 말했다.



◇ “할아버지가 부자 아니면 강남 살아도 하류층”

남들 보기에 고액 소득자로 보이는 김 부장은 가족과 함께 외식을 해본 지가 오래됐다.

왜냐하면 사교육비와 은행 대출이자는 물론 월평균 30만원 하는 아파트 관리비, 각종 보험료 30만원, 자동차 유지비 60만원, 각종 세금, 경조사비, 반찬비 등을 내고 나면 매달 평균 100만∼200만원의 빚이 쌓이기 때문이다.

아파트 값이 오르면 어떻게 해결되겠지 하는 생각에 처음에는 은행에서 마이너스 대출을 받아 생활비를 해결했지만 이제는 그것도 거의 동이 나고 있다.

김 부장은 얼마 전 한국은행이 금리를 인상했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요즘 밤잠을 자지 못한다.

대출금리가 오르고, 이자 부담이 늘어나면 그 돈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특히 아파트 값이 본격적인 하락국면에 들어가면 길거리에 나앉아야 하는 신세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면 오싹하기까지 하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명문대를 졸업하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대기업 간부로 올라섰지만 김 부장은 또다시 하류층으로 내몰릴 위기를 맞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요즘 강남 아줌마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말이 있다.

“강남에서 상류층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부자여야 된다. 시댁이나 친정이 부자가 아니면 강남에 아파트가 있더라도 하류층이다.”

어렵사리 중산층에 진입한 사람들이 서서히 무너져 가고 있다. 그리고 우리 사회는 소수의 상류층과 다수의 하류층으로 나눠지고 있다.

2010년 7월 22일 목요일

[한우덕의 13억 경제학]중국경제 콘서트(10)‘(마늘파동과 천안함 사건)중국에 호구잡힌 한국Ⅱ’ [중앙일보]

[한우덕의 13억 경제학]중국경제 콘서트(10)‘중국에 호구잡힌 한국Ⅱ’ [중앙일보]

입력시각 : 2010-07-22 오전 9:46:33

앞의 글에 이어집니다. 혹 읽지 않으셨으면 다음 사이트에 들렸다 오세요.
http://blog.joins.com/media/folderListSlide.asp?uid=woodyhan&folder=1&list_id=11699584

*************
2002년 7월 DJ시절이었습니다. 한덕수 당시 청와대 경제수석(현 주미대사)이 낙마(落馬)합니다. 잘 나가던 분이 하루 아침에 옷을 벗게 된 겁니다.

뭔 일이었을까요?

그 해 들어 마늘 값이 폭락합니다. 중국산 마늘이 쏟아져들어온 때문이지요. 2000년 마늘협상의 여파였습니다. 6월들어 농민들이 일어섭니다. 전국 각지 농촌에서 험악한 분위기가 연출되지요.

'이러다간 농민 다 죽는다, 중국 산 마늘에 세이프가드(긴급수입제한)를 다시 연장하라!'

그런데 정부는 웬지 꿀먹은 벙어리였습니다. 가타부타 얘기가 없었지요. 농민 이익을 대변한다는 농협중앙회가 나섭니다. 중앙회는 당시 산자부 무역위원회에 '중국 산 마늘에 대한 세이프가드 연장'을 신청합니다. 그러나 농민들은 무역위로부터 엉뚱한 답을 듣습니다.

'2002년 말로 중국산 마늘 세이프가드 조치가 만료됐다'



뭔소리?

다시 2년 전 마늘 협상으로 돌아갑니다. 당시 중국은 '핸드폰'을 내세우며 한국 협상팀을 거세게 몰아갑니다. 그들은 협상을 질질 끌며 하나 얻으면 또 다른 것을 요구했습니다. '마늘 수입을 원래대로 해줄게'라는 것으로는 부족했습니다. 중국측은 '말 나온 김에 마늘 수입을 완전 자유화하라'고 밀어붙였습니다. 어쩌겠습니까. 호구잡혔으니 물러날 밖에요. 그래서 나온 게 바로 부속합의입니다. 그 합의서에는 이렇게 쓰여있었습니다.

‘2003년 1월1일부터 한국 민간기업이 (마늘을)자유롭게 수입할 수 있다’

이 사실이 밝혀지면서 2002년 여름 서울에서 또 다시 '마늘 파동'이 일어납니다. 정확히 1년 사이로 세 번째 벌어진 일입니다. '치욕적인 협상이다', '다시 협상하라'는 등 여론이 들끓었지요. 농민들이 서울로 올라와 연일 데모를 벌였습니다. 언론에서는 졸속협상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높았습니다.

'누가 협상 책임자지?'
'통상교섭본부장'
'당시 누구였지?'
'한덕수 경제수석'

그렇게 한 수석은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던 겁니다. 그러나 농민들의 불만은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재협상을 할 수는 없었습니다. 국제적 망신이었으니까요. 정작 농민들을 주저 앉힌 것은 월드컵이었습니다. 월드컵 4강만 아니었으면 더 높은 사람이 자리를 내놔야 했을 겁니다. 딱한 일입니다.

한덕수 주미대사는 YS-DJ-노무현-MB 정권에 이르기까지 요직을 두루 거치고 있는 경제관료입니다. 지난 정권에서 총리에 오르기도 했지요. 그가 새로운 자리로 옮길 때마다 '마늘'이 발목을 잡습니다. 야당은 청문회에서 마늘파동을 물고 늘어지며 그를 공격하지요.

맞습니다. 마늘파동은 우리나라 외교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를 극명하게 드러냈습니다. 그러나 외교관들에게 돌을 던질 수는 없습니다. 더 근본적인데 원인이 있었던 겁니다.

제3차 마늘파동이 한창 진행중이던 2002년 7월 20일 제주도 애월체육관.

이곳에서 민주당 지구당 개편대회가 열립니다. '리틀 DJ'라는 한화갑 당시 민주당대표가 참석해 축사를 합니다. 축사 중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내 지역구인 전남 무안・신안군이 전국 마늘 생산의 25%를 차지한다. 2000년 중국산 마늘에 대해 긴급수입제한조치(세이프가드)를 취한 것도 내가 주장한 것이다."

이건 또 뭔소리?

다시 2000년으로 돌아갑니다. 그 해 4월 초 정국은 총선을 2개월 앞두고 표심을 얻기 위한 정책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었습니다. 여당이었던 민주당 선거대책위가 '획기적인 안'을 내놓지요. 중국 산 수입 마늘에 대한 긴급 관세 부과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민주당은 당정협의도 거치지 않은 이 '조치'를 밀어붙입니다. 야당인 한나라당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무릇 정치인들은 '표'를 먹고 사는 존재니까요. 결국 총선을 10일 앞두고 세이프가드가 발표됩니다.

'농민표를 의식한 정치적 결정'이라는 비난을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제야 마늘파동의 원인(源因)이 어디 있었는지 드러났습니다. 그 후 어떤 일이 벌어졌는 지 우리는 이제 다 압니다. 세 차례의 마늘파동을 거치는 동안 우리는 중국에 호구만 잡혔을 뿐입니다. 마늘파동을 기점으로 한국과 중국의 외교적 위치는 역전되게 됩니다.

당시 마늘협상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했던 한 관리는 저와도 친합니다. 그는 마늘 협상을 통해 많은 것을 느끼고, 또 배웠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외교건, 전쟁이건, 승패를 가르는 요인은 적의 역량이 아닌 내부 결집 여부에 있다."

천안함 사건이 터졌습니다. 중국의 힘은 그 어느 때보다 더 크게 한반도를 억누르고 있습니다. 과연 우리는 이 '전쟁'을 치를 만한 내부 결집이 잘 갖춰졌는지, 되돌아보게 됩니다.

긴 문장으로 마늘파동을 언급했던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한우덕의 13억 경제학] 중국경제 콘서트(9) ‘(마늘파동)중국에 호구잡힌 한국’ [중앙일보]

콘텐츠 글로벌 네트워크/중국 2010/07/19 21:55 by 전충헌 코딕

[한우덕의 13억 경제학] 중국경제 콘서트(9) ‘중국에 호구잡힌 한국’ [중앙일보]

입력시각 : 2010-07-19 오전 9:17:27

여러분, 혹시 '호구잡혔다'라는 말 들어보셨나요?

제가 어릴 적 시골(충북 청원)에서 흔히 썼던 말입니다. 사전에는 없으니 사투리겠지요. '남에게 약점 잡혀 질질 끌려다니는 것', 그 게 바로 호구잡힌 겁니다. 팽팽하게 맞서던 두 사람이 결국 한 판 싸움을 벌입니다. 그 중 이긴 사람은 기세가 등등하고, 진 사람은 꼬리를 내리게 되지요. 진 사람이 바로 호구 잡힌 겁니다. 승자의 눈치를 봐야하고, 비실비실 피해다녀야 합니다.

천안함 침몰 사건이후 중국과 한국의 역학관계를 보면서 '호구잡혔다'라는 말을 떠올리게 됩니다. 북한을 싸고도는 중국의 반발에 막혀 안보리는 어정쩡한 성명을 내야 했고, 중국은 이제 한미 연합훈련도 하지 마라고 위협합니다. 중국 언론은 '한국이 경제는 중국에, 군사력은 미국에 의존하는 전략분열증을 보이고 있다'며 분명한 노선을 선택하라고 으름장을 놓기도 합니다. 중국을 무시할 수도 없게 됐습니다. 심지어 미국도 그들의 눈치를 봅니다. 참으로 역같은 상황입니다.

우리가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중국과 수교한 게 1992년입니다. 수교 초기 우리는 '역사 이래 처음으로 우리가 중국을 앞서는 관계'를 만끽했습니다. 기업인들은 중국에 가 돈자랑을 했고, 누구누구 만나고 싶다면 모두 만날 수 있었습니다. 정치적으로도 한반도 정세를 우리 유리한 방향으로 이끌어 갈 수 있었지요(최소한 표면적으로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관계가 역전된 상징적인 사건이 이었습니다. 중국에 호구 잡힌 것이지요. 그 '호구'의 기억을 더음어 봅니다.

제가 베이징특파원 생활을 하던 2000년 5월 말이었습니다. 회사에서 연락이 왔어요. 중국 산 마늘에 대해 최고 315%의 관세를 부과하는 세이프가드(긴급수입제한)을 발동될 것 같으니 중국의 대응을 주시하라는 것이었지요. 그렇게 '마늘파동'은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6월 1일 세이프가드 조치가 내려졌습니다. 중국 농산물 가격이 아무리 싸다고 해도 315%관세를 물고는 한국시장에 들어올 수 없습니다. 중국 산 마늘의 수입을 원천적으로 막아버린 것이지요. 당연히 중국이 반발했습니다. 꼭 일 주일 후 중국이 대응조치를 발표합니다. '한국산 폴리에틸렌과 핸드폰 수입을 금지한다'는 것이었지요.

'홧~?'.

한국은 '아뜨거!' 합니다. 당시 중국에서 들여오는 마늘 다 합쳐봐야 1천만 달러도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중국이 막아버린 시장 규모는 5억 달러를 넘는 규모였지요. 게다가 중국 핸드폰 시장은 'CDMA강국'이라는 한국에게 전략적으로 중요한 분야였습니다. 업계에서 난리가 났지요. 언론에서도 '되로 주고 말로 받았다'다며 정부를 질타했습니다.

정부가 다급해졌습니다. 부랴부랴 중국에 협상을 제안했지요. 6월29일 베이징에서 협상이 시작됩니다. 중국은 급할 게 없었습니다. '문제가 있으면 와서 따져보자'는 식이었지요. 한국 협상 대표단만 본국에서 훈령을 받아가며 애가 탈 뿐이었어요. 국내에서는 '산업 피해가 늘어가고 있다'며 조속한 타결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았습니다. 중국 대표들은 그 분위기를 즐기는 듯 했습니다. 그들은 오늘 합의 해 놓고는 다음 날 '다시 시작하자'라고 말하기도 했지요. 호구잡힌 겁니다. 취재하는 내 스스로가 챙피할 정도로 농락당하고 있었습니다.

7월15일 협상이 끝났습니다. 3만2000t을 50%이하의 저율 관세로 수입해주기로 했지요. 당시 수출입 상황으로 볼 때 중국 수출물량을 소화하고 남을 물량입니다. 핸드폰과 폴리에틸렌에 대한 중국의 수입금지 역시 풀렸지요. 40여일 만에 마늘 세이프가드는 없던 일이 됐던 겁니다. 온 나라를 확 뒤집어 놓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습니다. 이듬해 4월 중국이 한국 외교부에 공식 문서를 한 건 보냅니다. '약속한 마늘을 사가라'는 것이었지요.

'왠 마늘?'
'작년에 너희들이 사가기로 했던 3만2000t에서 덜 수입한 부분 1만t'

협상문이 문제였습니다. 중국은 '협정문에 명시된 물량에 대해서는 한국 정부가 책임져야 한다'고 밀어붙였습니다. 한국 측은 '정부가 수입해주기로 한 물량(1만t)은 모두 수입해 줬으니, 나머지는 민간이 알아서 할 일'이라고 답했습니다. '민간이 가격을 이유로 수입하지 않는 것을 정부가 어떻게 하느냐'는 식이었지요. 제2차 마늘파동이 일어난 겁니다.

협상문문을 놓고 서로 이견이 있다면, 객관성을 확보할 수 있는 영어 협정서를 보면 됩니다. 당연히 언론에서 '영어 협정문을 보여달라'고 했지요. 그런데 외교부 답이 걸작입니다. '그냥 중국어와 한국어로만 작성했다'.

여론이 들끓습니다.

'세상에 외교협상을 하면서 영문 협정서를 안만들어? 너희들 외교관 맞아?'

결국 한국은 1만t을 다시 사줘야 했습니다. 한번 호구가 잡히면 헤어나기 어려운 겁니다. 2차 마늘파동 역시 한국의 완패였지요.

그게 끝이냐구요?

아닙니다. 다시 이듬해 6월 중국 산 마늘이 다시 언론에 등장합니다. 이번에는 이면합의가 문제였습니다. 당시 청와대 경제수석이 옷을 벗어야 하는 대형 사건이었지요.

다음 얘기는 목요일 콘서트에서 다시 올리겠습니다.
To be continued



 

2010년 7월 20일 화요일

사거리 1500㎞ 순항미사일 양산…동북아 전략균형에 새변수 예고

사거리 1500㎞ 순항미사일 양산…동북아 전략균형에 새변수 예고
북·중 사정권…올안 실전배치
한겨레
» 한국군 보유 미사일 사거리
국방과학연구소(ADD)가 최근 사거리가 1500㎞인 지대지 순항미사일(현무-3C)의 양산에 성공해 올해 안으로 중부전선에 이 미사일을 실전 배치할 예정인 것으로 알려졌다. 사거리 1500㎞에는 북한 전역은 물론 중국 베이징과 동북지역, 일본 도쿄, 러시아 연해주까지 포함돼, 동북아 전략균형에도 영향을 끼칠 전망이다.

군 관계자는 18일 “국방과학연구소가 2008년부터 현무-3C 탐색개발에 들어가 양산에 성공했다”고 말했다. 이 미사일은 한반도에서 분쟁이 생길 경우 북한 전역의 군 지휘부, 레이더망, 미사일 기지, 핵 관련 시설을 멀리서 정밀공격하게 된다. 군 관계자는 “현무-3C 개발로 개전 초기 장거리 정밀타격무기 구실뿐만 아니라 상대방의 섣부른 군사행동을 예방하는 분쟁 억지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고 말했다.

현무-3C는 1~2m 오차로 목표물을 명중시킬 수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순항미사일은 인공위성을 사용해서 표적까지 지형을 입체사진으로 찍은 뒤 몇㎞씩 바둑판처럼 나눠 미사일의 컴퓨터에 기억시켜 둔다. 비행하는 순항미사일은 기억된 지형과 대조하며 궤도를 수정하므로 명중률이 매우 높다. 군 관계자는 “몇백㎞ 떨어진 20층짜리 건물을 목표로 순항미사일을 쏠 경우에, 예를 들어 9층 오른쪽에서 첫번째 창문을 겨냥해 명중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

한국군이 현무-3C를 개발한 것은, 순항미사일은 무인비행체로 분류되기 때문에 사거리에 제한 없이 개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은 탄도미사일의 경우 ‘사거리 300㎞ 이내, 탄두 중량 500㎏ 이하’로 묶어둔 한-미 미사일지침 탓에 중장거리 탄도미사일 개발을 하지 못한다.

한국군이 보유한 사거리 300㎞ 탄도미사일은 평양~원산 이북 지역에는 미치지 못한다. 한국군은 이를 보완하려고 순항미사일 개발에 나서, 사거리 500㎞의 현무-3A, 1000㎞의 현무-3B를 개발한 데 이어 1500㎞의 현무-3C를 개발했다. 저고도 수평비행을 하는 순항미사일은 족집게식 타격이 가능해 핵심 표적 선별타격과 보복타격에 쓰인다. 반면에 포물선형 탄도 비행을 하는 탄도미사일은 사거리가 길고 파괴력이 크기 때문에 상대방에게 공포감을 불러일으켜 전략적·정치적 효과를 거둘 수 있다.

권혁철 기자 nura@hani.co.kr

사정거리 1500㎞ '國産' 크루즈 미사일 실전배치

 
사정거리 1500㎞ '國産' 크루즈 미사일 실전배치
[조선일보] 2010년 07월 17일(토) 오전 03:00   가| 이메일| 프린트

우리 군과 국방과학연구소 (ADD)가 사정거리 1500km에 달하는 국산 순항(크루즈) 미사일을 개발해 실전 배치에 들어간 것으로 확인됐다.

17일 발간된 월간조선 8월호에 따르면, 군 관계자는 "국방과학연구소가 2008년부터 사정거리 1500km의 지대지(地對地) 순항미사일인 '현무-3C'의 탐색개발에 들어가 양산에 성공했다"면서 "올해부터 중부전선 00부대에 000여 기 이상을 실전배치한다"고 했다. 지금까지는 사정거리 500km인 '현무-3A', 사정거리 1000km인 '현무-3B'의 실전배치 사실만 알려져 있었다.

사거리 1500km '현무-3C'의 개발·실전배치에 따라 한국군은 북한 의 핵시설들은 물론, 평안남도 상원, 강원도 이천군 자하리, 함경남도 원산시 옥평노동자지구의 스커드·노동 미사일기지 등 북한의 주요 군사시설들을 완벽하게 사정권에 넣게 된다.

'현무-3'시리즈는 ADD의 탐색·체계개발, 시험평가를 거쳐 LIG넥스원(구 LG정밀)이 양산하고 있는 최신형 순항미사일이다. '현무-3C' 순항미사일은 길이 6m, 직경 53~ 60cm, 무게 1.5t, 엔진은 비행기와 같은 제트엔진을 장착한다. 속도는 마하 1(시속 1260km) 이하이며, 탄두는 450kg 정도로 목표물에 1~2m 오차를 갖고 있어 미국의 토마호크에 필적하는 성능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사거리 500km 이상의 순항미사일을 보유한 국가는 미국 · 영국 · 프랑스 · 러시아 · 중국 · 이스라엘 등 6개국 정도이고, 1500km 이상의 순항미사일을 개발한 국가는 미국·러시아·이스라엘·한국 등 4개국에 불과하다.

군 관계자는 "'현무-3C'를 작전에 투입하면, 유사시 한국군을 위협하는 북한의 미사일기지와 전쟁 지도부 시설을 개전 초반에 정밀 공격할 수 있다"면서 "그동안 남한 미사일은 평양 이북에 즐비한 미사일 기지에 손도 못 댔으나, 이번 '현무-3C'의 등장으로 이런 열세를 일거에 극복하게 됐다"고 했다. 북한의 미사일 발사로 2001년 새로 개정된 미사일 합의(미사일기술통제체제·MTCR)는 한국이 개발 가능한 탄도 미사일은 사거리 300㎞ 이내로 제한하되, 순항미사일은 무인항공기(UAV)와 같은 계열로 분류해 '탄두중량 500kg'을 넘지 않으면 사거리에 상관없이 개발할 수 있도록 했다. 이런 점을 고려, 국방부 는 북한의 탄도미사일 개발에 대응하기 위해 1990년대부터 사거리 제한이 있는 탄도미사일보다 순항미사일 개발에 주력해 대북 열세를 극복하려 했다.

2010년 7월 17일 토요일

[세금 이야기] 다주택 보유자 절세는 집 파는 순서에 달렸다

 
[세금 이야기] 다주택 보유자 절세집 파는 순서에 달렸다


 
Q = 서울에 사는 정호경 씨(52)는 20년 전에 매입한 강남 아파트에 거주하고 있다. 정씨는 또한 5년 전에 분당 아파트를 매입해서 세를 주고 있으며, 금년 초에는 부인이 용산에 있는 다가구주택을 구입해 현재 1가구 3주택자에 해당한다. 정씨 부부는 향후 보유하고 있는 주택 중 어느 것을 먼저 팔아야 세금을 줄일 수 있는지 궁금하다. 2년 후의 매매차익은 각각 6억원, 3억원, 1억원으로 추정된다.
A = 세법에서는 부동산의 경우 보유한 기간이 길수록 장기보유특별공제를 더 해주는 등의 혜택을 부여하고 있다. 하지만 다주택 보유자의 경우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며 파는 순서에 따라 내야 할 양도소득세도 달라지므로 유의해야 한다.
우선 정씨가 강남 아파트를 먼저 판 다음 분당 아파트를 팔 경우를 가정해 보자. 강남 아파트를 팔 시점에서 정씨는 3주택자이므로 장기보유특별공제가 배제되고 60% 세율을 적용받게 돼 약 3억9000만원의 세금을 내야 하며, 분당 아파트를 팔 때는 2주택자로서 50% 세율을 적용받게 돼 약 1억6000만원의 세금을 내야 하므로 결과적으로 정씨가 내야 할 세금은 합계 5억5000만원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마지막에 팔게 될 용산 다가구주택은 2년 이상 거주 요건만 갖추면 1주택자로서 비과세 혜택을 받을 수 있다).
다음으로 분당 아파트를 먼저 판 다음 용산 다가구주택을 판다고 가정하자. 분당 아파트는 60% 세율이 적용돼 약 1억9000만원, 용산 다가구주택은 33%의 일반세율이 적용돼 약 2000만원을 각각 내게 돼 합계 약 2억1000만원의 세금을 낼 것으로 예상된다.
마지막으로 용산 다가구주택을 먼저 판 다음 분당 아파트를 팔았을 경우를 가정해 보자. 용산의 다가구주택은 2009년 3월 16일부터 2010년 12월 31일 사이에 취득했으므로 장기보유특별공제는 배제되지만 보유주택 수와 관계없이 33%의 일반세율이 적용되므로 약 2000만원의 세금을 내면 되고, 분당 아파트는 약 1억6000만원의 세금을 내게 돼 정씨가 내야 할 세금은 합계 1억8000만원 정도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따라서 다주택 보유자들은 주택을 팔 때 다음과 같은 처분순서를 지켜야 절세할 수 있다. 물론 개별 사정이 다를 수 있으므로 처분하기 전에 전문가와 충분히 상의해야 한다.
첫째, 일반세율이 적용되는 주택이 있다면 매매차익의 크기와 관계없이 이를 먼저 처분할 것. 둘째, 일반세율이 적용되는 주택이 없다면 매매차익이 작은 주택부터 처분할 것.
셋째, 제일 마지막에 처분하는 주택은 팔기 전에 3년 이상 보유 및 2년 이상 거주 요건을 갖출 것.
넷째, 2009년 2월부터 1년 사이에 취득한 감면대상 미분양주택은 주택 수에 포함되지 않으므로 처분시기에 따른 세부담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이원배 매경세무센터 세무사]
 

2010년 7월 4일 일요일

수도이전공약으로재미좀 보았지

수도이전공약으로재미좀 보았지

2010.05.11 15:21 | 자료실 | 약방감초

http://kr.blog.yahoo.com/min7240/5690 주소복사

노대통령은 2002년 9월 30일 대선 선대위 출범식에서 "한계에 부딪힌 수도권 집중 억제와 낙후된 지역 경제의 근본적 해결을 위해 충청권에 행정수도를 건설, 청와대와 중앙부처부터 옮겨가겠다"고 공약했다. 노 전 대통령은 “수도권 집중과 비대화는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으며 국가적 결단이 필요하다"면서 "고속철의 건설과 정보화 기술의 발전, 청주국제공항 등은 행정수도 건설의 여건을 성숙시키고 있다"고 말했다. 노대통령은 "특히 청와대 일원과 북악산 일대를 서울시민에게 되돌려 줌으로써 서울 강북지역의 발전에 새 전기를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2010년 대한민국 전체를 뒤흔들고 있으며 지자체 선거 최대 이슈가 될 세종시 및 수도이전 논란의 시작이었다.



노대통령이 대선을 3개월 가량 앞두고 불쑥 행정수도 이전론을 던진 것은 지역균형발전의 소신도 있겠지만, 충청권 득표 전략의 일환이었다. 실제로 수도 이전 수준의 공약이라면 선대위 내부의 치열한 정책토론이 필요했음에도, 이 과정이 없었다. 당시 노후보 캠프에서 경제 정책을 담당했던 한 인사는 “지역균형 발전은 노대통령의 원칙과 신념이긴 하나, 충청지역에 행정수도를 건설하겠다는 것은 사실상 득표 전략의 일환이었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2003년 11월 6일 노대통령은 서울 세종로 정부중앙청사 별관에서 열린 신행정수도건설 국정과제 회의에서 “(충청권) 신행정수도 건설을 주제로 내가 지난 대선에서 좀 재미를 봤다”면서 “신행정수도를 반대하면 한나라당이 정치적으로 계속 불리해질 수 있다”며 두고 두고 문제가 되는 발언을 하기에 이르렀다. 바로 2002년 대선에서 노대통령이 수도이전 문제로 재미를 본 것에 대한 반대급부로,
노대통령의 수도이전 공약은 2004년 총선 직전이었던 12월 29일 본회의에서 신행정수도특별법이 199명 중 167명의 찬성으로 재적 의원 3분의 2를 가볍게 넘어서며 통과면서 실현되는 듯했다. 그러나 2004년 10월 21일 헌법재판소는 “수도이전은 관습헌법 사안임으로 국민투표와 국회동의를 거쳐야 한다”며 신행정수도특별법 위헌 판결을 내리며 암초에 부딪혔다. 헌법재판소의 논리는 “우리 헌법전상으로는 ‘수도가 서울’이라는 명문의 조항이 존재하지 아니한다. 그러나 서울은 사전적 의미로 바로 ‘수도’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며 수도 이전은 개헌 사안이라는 것이다. 즉 대한민국의 국기가 태극기라는 헌법 조항은 없지만, 국기는 관습적으로 인정받고 있기에 국기를 국민적 동의없이 국회가 바꿀 수 없다는 논리이다. 또한 헌법재판소는 수도이전은 통일과 안보의 사안이라는 점도 못 박았다.

무수한 '내'가 증언하는 6·25전쟁 기억과 아픔

[전문가 리뷰] 무수한 '내'가 증언하는 6·25전쟁 기억과 아픔

  • 전상인 서울대 교수·사회학

나와 6·25
조선일보 특별취재팀 엮음|기파랑|336쪽|1만5000원

여론조사에 의하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과거 2000년 동안의 한국사 10대 사건 가운데 6·25 전쟁을 으뜸으로 친다. 그 6·25가 올해로 발발 60주년을 맞이했다. 하지만 대다수 국민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기념사업이나 대형 행사는 찾아보기 어렵다. 최근 천안함 피폭을 통해 이 땅에서 전쟁이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라는 사실이 확인되었음에도 말이다. 세월 앞에 장사가 없듯 온 민족의 삶을 뒤흔들었던 6·25전쟁도 이렇게 시나브로 잊히고 마는가?

보다 염려스러운 것은 6·25에 대한 망각이 시간의 경과에 따른 자연스러운 현상만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언제부턴가 6·25를 말하는 것 자체가 고루하게 비치고 거북하게 느껴지는 것은 수상한 시류(時流) 탓도 없지 않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고등학교 역사 교과서를 다시 한 번 보라. 전쟁의 진실과 책임 문제에 대해 많은 부분이 여전히 수박 겉핥기다. 10~20대의 절반 이상이 6·25 전쟁의 발발 연도를 모르게 된 것은 결국 6·25를 충분히 혹은 제대로 가르치지 않은 기성세대 잘못이다.

이처럼 허망하게 잊혀가는 6·25전쟁을 더 늦기 전에 육성(肉聲)을 통해 되살리려는 책이 바로 '나와 6·25'다. 이 책의 저자는 다름 아닌 '나'다. 그 가운데는 직접 전쟁을 체험한 '나'도 있고, 조부모나 부모세대의 경험을 물려받은 '나'도 있다. 당시 군인이었던 '나'도 있고, 촌부(村婦)였던 '나'도 있으며, 유엔군으로 참전했던 외국인 '나'도 섞여 있다. 보통사람인 '나'가 대부분이지만, 추기경이나 장군·연예인처럼 유명한 '나'도 들어 있다. '나와 6·25'는 이처럼 다양한 '나'가 겪은 한국전쟁을 온몸으로 증언하고 간증한다.

이 책에 담긴 이야기들이 지난 석 달간 신문에 연재될 때도 느꼈지만 책으로 묶인 것을 접하며 또다시 슬펐다. 직업상 보통 사람들보다 냉정한 '기자들을 울게 할 정도'로 너무도 아픈 얘기가 도처에 깔려 있기 때문이었다. 80세의 어떤 할머니는 60년 전 자신의 고향을 '살인 지옥'으로 회상하면서 전쟁이 끝나고도 30년 동안 고향에 가지 못했다고 말한다. 셋째 아들은 3형제 가운데 위의 둘을 나라에 바치고 난 다음 "살아 돌아온 것만으로 니는 효도했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어머니를 잊을 수 없다. 인민군에 의해 형장으로 끌려가는 순간에도 자신을 찾아 고개를 두리번거리던 아버지가 너무나 무서워 도망쳤다는 막내딸은 지금도 울고 있다.

책에는 더러 재미있거나 우스운 얘기도 실려 있다. 북한군이 쏜 야포 파편 2개를 평생 왼쪽 뒷머리 속에 넣고 살고 있다는 82세 할아버지는 아무데서나 머리를 손질할 수 없어 두 살 위의 이발사에게 55년간 자신의 머리를 맡겼고 두 사람은 형제처럼 살고 있다고 한다. 1953년 7월 27일 오전 휴전협정이 발효된 직후, 강원도 화천 북방 금성천에서는 국군·유엔군·북한군·중공군이 함께 목욕하고 물장구를 쳤다는 기록도 참으로 인간적이다.

중공군의 포로로 잡혔던 영국인 참전 용사는 아직도 중국 식당에 들어가면 무언가 다가오는 것 같아 무섭다고 말한다. 콜롬비아의 참전 군인은 정작 무서웠던 것은 중공군이 아니라 한국의 겨울이라고 말한다. 당시 한국을 도왔던 많은 외국 군인들이 한국을 제2의 고향으로 생각하는 마당에,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비자 받기가 까다롭다고 말하는 필리핀 참전 용사에게는 한국 정부를 대신해 사과하고 싶다.

이 책에 등장하는 수많은 '나'들은 전쟁의 기억을 토로함으로써 비로소 전쟁의 족쇄로부터 풀려나는 해원(解寃)의 경지에 이르고 있다. 새벽 두시에 원고를 보낸 81세 할머니는 "이제 한 짐 덜고 저 세상으로 가볍게 가겠다"고 적었다. 6·25 전쟁에 대한 '연구'는 학자들의 몫일지 모른다. 하지만 '기억'의 궁극적인 주체는 어디까지나 평범한 개인이라는 사실을 이 책은 웅변하고 있다.

2010년 7월 3일 토요일

★ 6, 25. 전화(戰禍) ★

Subject ; 6,25의 전화

★ 6, 25. 전화(戰禍)

 

 다시 보기 어려운 귀한 사진

 아래 사진은 결코 잊지 말아야죠. 

 

 

▲ 1950. 9. 30. 전화(戰禍)로 폐허가 된 대전역 

 

 

 
▲ 1950. 11. 24. 불타버린 서울역 앞 세브란스 병원.
 
 
 
▲ 1950. 10. 7. 불타고 있는 김포 비행장 
 
 
 
▲ 1950. 10. 18. 전화에 그을린 중앙청 
 
 
 
▲ 1950. 10. 18. "국파산하재(國破山河在)",
멀리 북악산과 중앙청 돔이 보인다.
 
 
 
▲ 1950. 9. 20. 왜관, 낙동강 철교 복구 공사.
 
 
 
▲ 1950. 10. 12. 미조리호 군함에서
청진항을 향해 함포사격을 가하고 있다.
 
 
 
▲ 1950. 10. 20. 400여 명의 낙하산
부대가 평양부근에 투하되고 있다.
 
 
 
▲ 1950. 12. 18. 북한군에게 뿌린 귀순 권유 전단.
 
 
 
▲ 1950. 11. 2. 적십자사에서 피난민에게 구호물자를 나눠주고 있다.
 
 
 
▲ 1950. 10. 13. 경기도 파주, 참혹하게 학살된 시신들.
 
 
 
 ▲ 1950. 11. 1. 서울 중앙청 앞 지금의 문화관광부 자리,
주민들이 폐허더미에서 땔감이나 돈이 될만한 물건을 찾고 있다.
 
 
 
▲ 1950. 11. 2. 원산의 한 성당, 폐허가 된
성당 내부를 신도들이 청소하고 있다.
 
 
 
▲ 1950. 11. 6. 북한의 어느 농촌, 탈곡한 볏단을 달구지에 싣고 있다.
 
 
 
▲ 1950. 11. 6. 북한의 어느 농촌, 전란 중에도 추수를 하고 있다.
바람개비로 알곡을 가리는 농부들.
 
 
 
▲ 1950. 11. 19. 북한의 한 지하 무기 공장 내부.
 
 
 
▲ 1950. 11. 20. 국경지대, 미군들이 소달구지로 보급품을 운반하고 있다.
 
 
 
▲ 1950. 11. 18. 미군 폭격으로 파괴된 흥남 비료공장.
 
 
 
▲ 1950. 11. 18. 미군 폭격으로 파괴된 흥남 송전소.
 
 
 
▲ 1950. 11. 23. 함경도 갑산, 미군 폭격으로 성한 집이 드물다.
 
 
 
▲ 1950. 11. 1. 황해도 평산에 진격하는
유엔군을 두 여인이 전신주 뒤로 불안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다.
 
 
 
▲ 1950. 12. 4. 평양을 떠나 대동강을 건너 후퇴하는 국군.
 
 
 
▲ 1950. 12. 6. 황해도 사리원, 남행하는
피난열차에 피난민들이 몰려들고 있다.
 
 
 
▲ 1950. 12. 8. 경기도 금촌, 38선을 넘어 후퇴하는 유엔군 차량들.
 
 
 
▲ 1950. 12. 9. 끊어진 한강철교.
 
 
 
▲ 1950. 12. 10. 포화에 불타는 마을.
 
 
 
▲ 1950. 12. 12. 한강 부교를 통하여 후퇴하는 차량들.
 
 
 
▲ 1950. 12. 12. 피난민들이 한강을 나룻배로 건너고 있다.
 
 
 
▲ 1950. 12. 12. 유엔군들이 인천항을 통해 장비들을 후송시키고 있다.
 
 
 
▲ 1950. 12. 12.
유엔군들이 후퇴하면서 다리를 폭파시키고자 폭약을 장치하고 있다.
 
 
 
▲ 1950. 12. 3. 평양, 남행 피난민 행렬 속의 한 소녀. 
 
 
 
▲ 1950. 12. 10. 중공군의 참전으로 강추위 속에 후퇴 행렬.
한 병사가 너무 추운 날씨로 모포를 뒤집어쓰고 있다.
 
 
 
▲ 1950. 12. 12. 흥남부두, LST 함정에 가득 탄 군인과 피난민들.
미처 함정에 오르지 못한 피난민들이 발을 동동거리고 있다.
 
 
 
▲ 1950. 12. 14. 서울역, 남행 피난민들이 북새통을 이루고 있다.
 
 
 
 ▲ 1950. 12. 16. 흥남, 국군과 유엔군들이
후퇴하고자 부두에서 수송선을 기다리고 있다.
 
 
 
▲ 1950. 12. 27. 흥남, 얕은 수심으로 수송선이 해안에
 닿을 수 없자 유엔군들이 바다에 뛰어들어 LST로 가고 있다.
 
 
 
▲ 1950. 12. 24. 흥남, 유엔군들이 철수 후 부두를 폭파시키고 있다.
 
 
 
▲ 1950. 12. 19. 묵호, 흥남에서 철수한 장비를 묵호(동해)항에 내리고 있다.
 
 
 
▲ 1950. 12. 28. 서울, 피난민들이 강추위 속에
한강 얼음을 깨트리며 나룻배로 남하하고 있다.
 
 
 
▲ 1951. 1. 5. 피난 행렬 속의 소년과 소녀.
소달구지가 힘겨워하자 힘을 보태고 있다.
 
 
 
 ▲ 1950. 10. 11. 서울 교외, 부서진 북한군 전차 위에서 아이들이 놀고 있다.
 
 
 
▲ 1950. 11. 1. 전란으로 폐허가 된 서울.
 
 
 
▲ 1950. 12. 28. 끊어진 한강 철교, 오른쪽은 임시로 만든 부교.
 
 
 
▲ 1951. 1. 3. 한강 철교 부근의 언 강을 피난민들이 걸어서 건너고 있다.
 
 
 
▲ 1951. 3. 16. 서울 중구의 수도극장(현 스카라 극장) 일대.
 
 
 
▲ 1951. 3. 16. 하늘에서 내려다 본 중앙청 광화문 세종로 일대.
 
 
 
 ▲ 1951. 3. 16. 비행기에서 내려다 본 왕십리 일대,
멀리 고려대학교 건물이 보인다.  
 
 
 ▲ 1951. 3. 16. 하늘에서 내려다 본 서울역 일대.
 
 
 
 ▲ 1951. 3. 16. 하늘에서 내려다 본 중앙청,  
경복궁, 수송동, 팔판동 일대.
 
 
 
 
▲ 1951. 3. 19. 구호 양곡을 먼저 탄 소년과  
양곡을 타기 위해 줄을 선 주민들.  
 
 
▲ 1950. 10. 12. 원산. 학살된 시신들
 
 

▲ 1950. 12. 11. 고단한 피난길.
 
 

▲ 1950. 12. 16. 폭격에 엿가락처럼 휘어진 철교.
 
 

▲ 1950. 12. 17. 보급품을 실은 화물 열차가 폭격에 불타고 있다.
 
 

1950. 12. 18. 대구.

훈련소에서 교육을 마친 신병들이 전선으로
가고자 광장에 집결해 있다.
 
 
 
 ▲ 1950. 12. 18. 전방으로 떠나는 신병들.
 
 
 
1950. 12. 18. 대구역. "총알을 요리조리 잘 피해서
어예든동 살아오이라.
 
 
 
 
 1950. 12. 21. 경북 왜관. 낙동강 철교 어귀에 부서진 북한군 소련제 탱크.
 
 
 
▲ 1951. 1. 20. 아버지와 아들의 피난길, 다른 가족은 전란에 모두 죽었다.
 
 
 
 1950. 6. 18. 6.25 한국전쟁 발발 일주일 전
의정부 북방 38 접경에서 미 국무장관 덜레스
(가운데) 일행이 38선 너머 북쪽을 살피고 있다.
 
  
 
▲ 1950. 6. 18. 미 국무장관 덜레스 일행이 38 접경 지대를 살피고 있다.
 
 
 
▲ 1950. 7. 한미 수뇌부들이 환담하고 있다.
(왼쪽부터 조병옥 무장관, 신성모 국방장관, 무초 주한 미대사,
임병직 외무장관, 워커 주한 미군 사령관).
 
 
 
▲ 1950. 7. 26. 맥아더 장군이 전선을 시찰하는 중,
종군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오른쪽 워커 장군.  
 
 
▲ 1950. 8. 15. 이승만 대통령과 신성모 국방장관이,
8.15 경축식을 끝낸 임시 국회의사당인
문화극장을 떠나고 있다.
 
 

▲ 1950. 8. 18. 백선엽 장군(가운데)이 미군과 함께 작전을 세우고 있다.
 
 

▲ 1950. 9. 16. 구포 신병 훈련소에서 훈시하는 이승만 대통령.
 
 
 
▲ 1951. 2. 7. 전선을 시찰하는 맥아더 장군.
 
 

▲ 1951. 2. 15. 대한민국 해상 이동방송선(HLKT)을 방문한 장면 총리 일행.
 
 

 ▲ 1951. 9. 콜트 미 8군 부사령관의 이임식장
(왼쪽부터 허정, 콜트. 무초 주한 미대사).

Evening Bell / Sheila Ry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