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6·25] 北상공서 미그기 격추시키고 귀환하는데 연료가…
입력 : 2010.03.25 03:01 / 수정 : 2010.03.25 05:25
[14]전투기 조종사로 6·25 참전했던 샘 존슨 美 연방하원의원
F-86 총 62회 출격, 적기 3대 격추·손상시켜…
동료들과 차 타고 서울 가다가 北게릴라들 만나 총격전도… 45구경 권총으로 적 사살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했을 때 나는 미 텍사스주 남부감리대(大) 대학생이었다. 당시 나는 ROTC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콜로라도주 덴버의 여름 캠프 도중 한반도에서 전쟁이 났다는 사실을 들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공군 비행학교에 입교(入校), 조종사가 됐다.1952년 12월 도쿄를 거쳐 눈 내리는 수원공항에 발을 디뎠다. 당시 내 나이 스물둘, 계급은 소위였다. 고향 댈러스에 아내와 두 아이, 그리고 부모님을 두고왔다. 한국의 첫인상은 몹시도 춥다는 것이었다. 미국 남부 텍사스주 출신인 내게 그렇게 추운 겨울은 처음이었다. 수원에 도착한 날, 25㎝의 눈을 경험했다.
한국에 있는 동안 F-86 전투기를 조종, 총 62회 출격했다. 전투기의 이름은 내 아내와 고향의 이름을 딴 '셜리의 텍사스 토네이도(Shirley' Texas Tornado)'로 지었다.
우리 비행대대 임무는 수도권 상공을 지키는 것이었다. 당시 서울 인근에는 2개의 미군 비행단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50대는 김포에, 또 50대는 수원에 있었다.
- ▲ 6·25전쟁 당시 전투기 조종석에 앉은 샘 존슨 의원. / 샘 존슨 의원 제공
1953년 7월 휴전 직전에는 압록강까지 출격했다. 한번은 블라디보스토크까지 갔던 경험도 있다. 소련군의 보급현황을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젊었기 때문일까. 나는 결코 적들과 마주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6·25 전쟁 중에 총 3대의 미그(MIG) 전투기를 격추 또는 일부 파괴했다. 한 대는 완전히 격추시켰고, 한 대는 실종시켰으며, 또 한 대는 크게 망가뜨렸다.
북한 상공에서 미그기를 격추시킨 후, 지그재그 비행으로 위험지역을 벗어났다. 전투를 마치고 나니 연료가 별로 없어 위험한 상황이었다. 계기판을 보니 수원공항까지 갈 연료가 되지 않았다. 급히 방향을 틀어 김포 비행장으로 비상착륙한 기억이 난다.
조종사들 중에는 적에게 포로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 내가 속한 비행 대대의 헬러(Heller) 대령이 격추당해 중국군의 포로가 됐었다. 그는 전쟁 이후에도 즉각 돌아오지 못하고 한참 동안 포로생활을 했다. 다른 동료도 중국군의 포로가 돼 고문을 당했다.
하늘이 아닌 땅에서 전투를 벌인 적도 있다. 하루는 수원에서 서울로 갈 때였다. 나를 포함해 4명이 지프를 타고 가다 언덕에 있는 북한군 게릴라들을 발견했다. 나는 차를 길가에 세우고 동료들에게 "차에서 뛰어내리라"고 소리쳤다. 우리가 가진 것은 45구경 권총뿐이었다. 그들이 가까이 다가오자 일제히 사격을 가해 사살했다.
하늘 위에서 바라본 한반도 상공은 아름다웠다. 하지만 당시 지상에 있는 한국은 완전히 파괴된 상태였다. 그 처참한 상황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한국인들은 그렇게 추운 겨울에 옷도 제대로 못 입고 있었다. 어떻게 그런 상황을 견뎌냈는지 모르겠다. 미군부대에서 일하는 한국인들이 많이 있었다. 우리는 가능하면 그들을 많이 도와주려고 했다. 수원을 재건하는데도 힘을 보탰다. 1953년 11월까지 1년간 한국에서 근무하면서 중위로 진급했다.
우리가 압록강까지 진격해 놓고서도 이를 지키지 못한 것은 무척 안타깝다. 중국군이 참전하면서 물러난 것이 아쉽다. 미국은 당시 외교적 실수를 저질렀다. 미 의회가 전쟁을 더 이상 하지 않기로 결정을 내려 결국 지금의 휴전선이 만들어졌다. 그런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면 북한 땅에도 자유가 있을 텐데…. 한국은 하나였잖은가. 지금도 휴전이 계속되고 있을 뿐, 아직 전쟁이 끝난 것은 아니다.
한국에서의 전투 경험은 그 후 베트남전에서 많은 도움이 됐다. 베트남전에서도 전투기 조종사로 활동했고 비행기가 격추당해 7년 동안 '하노이 힐튼'으로 불렸던 포로수용소에 수감됐었다. 귀국 후에도 미 공군에 근무하다가 대령으로 예편했다.
6·25 직전의 한국과 지금의 한국은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다. 한국인들은 지난 60년 동안 굉장한 일을 해냈다. 6·25 전쟁 이후 한 번도 한국을 방문하지 못했다. 한국측에서 초청장을 보내와 방문하려고 했었다. 그러나 2001년 9·11 사태가 터지는 바람에 취소됐다. 기회가 되면 치열한 싸움이 펼쳐졌던, 지금은 발전해 있는 한국을 다시 방문하고 싶다. 당시 텍사스주 출신으로 생사를 함께했던 전우(戰友)들을 지금도 가능한 한 많이 만나고 있다. 만나면 한국의 발전에 대해서 이야기꽃을 피우곤 한다.
1991년 연방하원의원에 당선된 뒤에는 6·25 전쟁의 교훈을 알리기 위해 노력해왔다. 만약 지금이라도 한국에서 전쟁이 발발하면 미국은 당장 자유를 지키기 위해 도울 것이다. 올해 6·25 전쟁 60주년을 맞아 한국과 미국이 진정한 '친구'임을 보여줘야 할 때다. 사람들은 6·25 전쟁을 '잊혀진 전쟁'이라고 하지 않나. 전쟁의 의미가 많이 잊혀진 상황에서 자유를 지켜 낸 전쟁의 소중한 의미를 되살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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